The Game Director Returns from Hell RAW novel - Chapter (32)
#32화
챕터 2, 그리고 그 이후의 디자인에 들어가야 할 때다.
그런 만큼 소녀의 여정을 지켜보던 때를 회고한다.
막 이단자들의 지옥에서 신의 시험을 마친 소녀는 그전까지와 180도 다른 곳에 발을 들였다.
가장 먼저 연상한 것은 ‘보라색’이었다.
그곳은 보라색의 기름을 흩뿌려 공간을 어그러뜨린 듯한, 그리하여 꿈속에 빠져있는 듯한 착각을 주는 장소였다.
[여긴 향락의 지옥이야. 출구는 저쪽.]나비가 나풀나풀 날아올라 한 방향을 가리켰다.
과연, 그제서야 나는 출구부터 알려주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출구만이 유일하게 흰색 직사각형 형태의 문을 하고 있었다.
꽤 멀리 있음에도 그것만이 유독 눈에 잘 들어왔다.
“그런 사람들?”
[쾌락에 젖어서 현실을 잊은 사람들.]가톨릭의 성경을 연상케 하는 말이었다.
쾌락을 죄로 규정하여 벌을 주곤 절제의 미덕을 깨우치게 하는 곳인가?
가장 처음 예상한 것은 그랬지만, 이놈의 지옥이라는 게 그렇다.
단 한 번도 내 예상대로였던 적이 없다.
[이곳은 모두가 빠져나갈 방법을 알고 있어. 간단해. 저 문으로 가서 문을 열면 되는 거야. 하지만 누구도 나가지 않아.]“왜?”
[이곳을 나가면 다시는 이만한 쾌락을 얻을 수 없거든. 죄수들은 그런 확신이 있어.]향락의 지옥엔 헐벗은 죄수들이 있다.
그들은 대체로 풍경에 녹아들어 형상이 어그러진 채였는데, 가만 보면 눈물이나 콧물을 질질 흘리며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이 맑아진 듯 몸을 일으킨다.
“아아··· 아아···!”
탈력감, 절망감, 그런 감정에 휩싸인 것으로도 보였다.
나비는 그를 설명했다.
[이곳은 하루의 절반을 쾌락에 취해 살아. 나머지 절반은 현실로 끌려 나와. 가장 행복한 순간과 가장 불행한 순간을 영원히 반복하는 거지.]냉탕과 온탕 사이를 오간다 표현하면 될까.
한데 그렇다면 이 일에 지쳐 문을 여는 사람이 하나는 있지 않을까.
의문은 이윽고 스러졌다.
[혹시 아니? 기쁨이란 건 말야. 그것의 노예가 되는 순간 너의 자유를 앗아간단다. 너를 구속하고, 조종하고, 또한 강제할 거야. 매 순간 기쁨만을 생각하게 만들어. 현실이 괴롭다면 그 시간이 괴로운 만큼 더욱 자신을 찾게 만들지.]스스로를 지옥에 빠지게 만드는 공간.
그리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쾌락에 미쳐본 사람들만 이곳에 떨어져. 그것이 어떤 형태의 쾌락이든 상관없어. 이곳에 떨어진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생전 느꼈던 어떤 행복보다 더 큰 쾌락을 느끼게 되니 더욱 그것에 목을 매지. 그러다가 쾌락 탓에 잃은 것들을 마주 보게 돼. 후회와 실패의 반복인 거야. 여긴 나락이고.]앞서 나비가 이른 것이 있었다.
지옥은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 곳이라고.
이곳에도 그런 존재가 있었다.
그것은 수십수백의 사람들이 서로 얽혀 만들어진 덩어리였다.
이 역시 공간의 보라색 기름에 의해 어그러진 형상이었다.
그들 중 누구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수백의 얼굴 중 어떤 것은 잠들어 있었고, 어떤 것은 깨어서 쾌락을 만끽하고 있었다.
[고통은 나누고 쾌락은 배로 만드는 거지. 저 덩어리의 목적은 하나야. 더 큰 쾌락, 더 작은 고통. 마침 시작하네. 잘 봐. 네가 피해야 할 괴물이니까.]덩어리가 꿈틀꿈틀 움직이며 형상을 바꿨다. 몇십의 몸뚱어리가 얽혀 만들어진 것은 거대한 짐승의 주둥이였다.
그것이 홀로 멍하니 괴로워하던 죄수 하나를 집어삼켰다.
이윽고 덩어리엔 새로운 얼굴이 자라났다.
그는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끝이야. 저렇게 되면 영원히 이 지옥에 남아 있게 되는 거지. 뭐? 그럼 여기가 지옥이 아니게 되는 것 아니냐고? 글쎄, 자아조차 잃은 고깃덩어리를 존재로 규명할 수 있다면 그렇겠지. 명심해. 저건 영혼의 완전한 소멸을 뜻하는 거야. 끔찍한 일이라고.]덩어리는 이 나락의 밑바닥이었다.
상징적이었고, 또한 수긍이 가는 형태였다.
누구도 개인의 의지를 잃고 싶어 하진 않을 테니까.
[자, 어서 가자. 이곳은 위험해. 빠르게 나갈 필요가 있어.]소녀의 두 번째 모험엔 많은 말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게임적으로 해석하자면 그랬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덩어리의 위협은 보스 몬스터로.
공간 전체에 자욱하게 퍼져 있는 쾌락의 향은 제약으로.
그리고 현실을 직시하며 괴로워하는 것은 일반 몬스터로.
그곳 역시 어드벤처 장르로서 충실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 * *
한서림이 묻는다.
“이번 것도 참 어렵게 기획해 놨네요.”
눈초리가 따갑다.
하기야 어그러진 공간과 보스 몬스터인 덩어리의 모델링, 그리고 몽환적으로 흐트러지는 가운데 홀로 새하얀 문을 맵과 오브젝트라는 형태로 구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내 원화의 퀄리티가 처참하다 보니 한서림의 컨셉 아트 난이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는 편이었다.
조아윤에게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 챕터는 사운드적인 고민이 특히 많이 필요하다.
현실과 쾌락 사이에 존재하는 몽환적 분위기, 그리고 보스 몬스터의 이질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에겐 가이드 라인이 있다.
“기본적인 골자는 첫 번째 챕터 대로 갈 거야. 사실 데모 버전을 만들면서 얻은 소소한 이득이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헬릭2의 컨셉은 이미 완성됐다는 말이야.”
그냥 하는 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헬릭2는 이미 게임의 기획 단계에서 필요한 모든 요소를 데모 버전에서 충족시켰다.
“통일성. 우리는 챕터1의 느낌을 그대로 살려서 챕터4까지 이어갈 거야.”
무릇 게임의 챕터란 서사의 분기점이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다채로움을 자아내야 한다.
유저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해 게임에 필연적으로 따라올 지루함을 걷어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절대 해쳐선 안 될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게임의 큰 틀에서 적용되는 통일성이 그것이다.
“챕터1의 디자인에서 포인트는 현대와 고전 미술의 조화였지. 신의 형상을 본뜬 것이 특히 그랬어. 이걸 이어 나갈 거야. 다양한 미술적 디자인 활용을 컨셉으로 쓰는 거지.”
말하자마자 한서림이 의견을 제안했다.
“으음, 유화? 챕터2는 유화로 가는 거 어때요? 고전부터 현대까지 꽤 여러 방법으로 쓰였거든요. 마침 기름이라는 키워드도 있으니까.”
“네 영역이야. 맡길게. 다양하게 시도해서 가져와. 가장 내 구상에 어울리는 거로 뽑을 테니까.”
“어휴, 대학 과제하는 기분이네.”
질린 얼굴을 하지만 의욕은 고취된 듯한 모습이다.
애초에 잘하는 애니까 이 정도면 그럴싸한 것으로 가져올 터다.
다음은 조아윤.
“아윤이 너는 이번에도 시간이 많아. 사실 일 년은 더 고민해도 돼. 어차피 프로그래밍까지 하고 나면 시간이 꽤 걸릴 거야. 그동안 사운드 이펙트의 음악적 활용에 대해 더 공부해줘. 그 유리 파열음을 썼던 것처럼.”
“네, 넵···!”
“좋아, 회의는 여기까지. 다들 일 시작해.”
경험은 누적되는 것이다.
이번처럼 같은 컨셉을 공유하며 다른 그림을 그리는 경우엔 그게 더욱 부각된다.
이미 자체적으로 쌓아 올린 레퍼런스와 노하우가 있는 만큼 작업이 전처럼 더디진 않을 터.
이쪽은 앞으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제 정말 팀의 구색을 만들어가기 시작했으니까.
‘신경 써야 할 쪽은 나지.’
디자인과 모델링이 뽑히는 대로 구현에 들어가야 한다.
아니, 그 이전부터 필요한 베이스를 만들어두어야 한다.
즉, 프로그래밍의 시간이다.
하지만 시간이 녹록지는 않다.
당장 벌려놓은 외부 마케팅의 정리, 앞으로의 일정 조율과 재무적인 사항 등 당장은 내 손을 거쳐야 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와중에 프로그래밍까지 했다간 데모 발매 전처럼 몸이 신호를 보내는 순간이 올 터다.
그러니 슬슬 찾아야 한다.
‘프로그래머.’
이 악랄한 프로그래밍을 도와줄 친구를.
* * *
새삼스러운 말을 하자면 그랬다.
내가 쓰는 알고리즘은 이 시대의 것보단 훨씬 앞서나간 형태다.
물론 프로그래밍이란 게 정해진 코드를 어떤 식으로 응용하는 지에 관한 학문인 만큼 시대에 따른 변화가 극적이진 않지만, 시대에 따라 더 효율적인 방법이 보편화되는 등의 변화는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누굴 데려오든 이 시대엔 보편적이지 않은 내 방식을 가르쳐야 해. 그리고 보통 능력 있는 놈들은 자기보다 어린 놈 말을 안 들어.’
이제 24세, 몸뚱어리가 꽤 젊다.
이 몸으로 내 알고리즘을 배워 따라 하라면 능숙한 프로그래머들은 대부분은 반발할 것이다.
물론 실제로 효과가 있다면 따라 하기야 하겠지. 하지만 상대방의 자존심이 긁히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즉, 지금 상황에 내 알고리즘을 이해하면서도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게 얼마나 힘들지는 말해봐야 뭣하겠는가.
흔히들 프로그래머를 사회성이 결여 된 직종이라 치부하는 일이 많다.
어느 면에서는 맞지만, 어느 면에서는 틀리다.
단호히 말하길, 프로그래밍 팀은 그 어느 직종을 데려와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프로그래밍적 의사소통’이 극히 중요한 직종이다.
서로가 짜놓은 코드를 이해하고, 맞추고, 그것을 조율하는 과정은 열린 사고와 이해력이 없다면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명의 프로그래머만 뛰어날뿐 전체가 뒤떨어지는 팀과, 준수한 여러 명의 프로그래머가 합심해 만든 팀의 결과물을 비교해보면 후자가 훨씬 좋은 것으로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아무렴, 이해하지도 못하는 프로그램을 만지는 초짜가 팀에 있다면 멀쩡한 프로그램에도 버그가 발생하지 않겠나.
다른 일례를 들자면 서로 다른 업무 스타일을 가진 이들을 모아 봐야 그 간극 탓에 버그가 발생하고 만다.
디버그에 쓸 시간만 더 는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프로그래밍은 팀워크다.
지금의 경우엔 그것이 문제였다.
‘적당한 사람을 찾는 게 힘들어.’
나 자신을 되돌아보면 아는 사실이 있다.
나는 꽤 독선적인 사람이며, 누군가에게 맞추기보단 타인을 내게 맞추는 일처리 방식에서 더 능률을 뽑아내는 편이었다.
내 팀인 만큼 그 기조를 유지해야 하긴 할 텐데, 능숙한 사람을 데려오자니 가르치는 시간이야 짧겠지만 사사건건 태클을 걸거나 의견을 제시해올 테다. 나는 그걸 묵살해 팀워크를 해칠 것이고.
그렇다고 초짜를 데려오자니 알고리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놈을 실전에 바로 투입하는 것 불가능에 가깝다.
‘적당히 빠릿빠릿하고 적당히 젊고 적당히 내 말 잘 듣는 놈.’
그런 꿈같은 놈이 뿅 하고 나타날 리가.
꿈에나 있을 법한 사람이란 걸 나도 아는 게 문제다.
이제까지 프로그래밍 인원 구인을 미룬 가장 큰 이유가 이것이었다.
한숨이 푹 튀어나왔다.
“뭘 그렇게 한숨을 쉬어요? 복 나가게.”
한서림이 다가왔다.
“있어.”
말하며 고개를 드니 한서림이 컨셉 아트 몇 장을 가져왔다.
확인해보니 꽤 괜찮다.
“맵은 저번 거보다 낫네. 몬스터는 저번이 낫고. 둘이 섞자.”
“그쵸? 내가 생각해도 그래서.”
한서림이 쉽게 수긍했다.
한동안 쉬다 다시 일해서일까, 그도 아니면 커뮤니티의 데모 반응이 좋아서일까.
요즘 일에 꽤나 열정적이다.
생각하던 중이었다.
“아참.”
“응?”
“아윤이 검정고시 있잖아요. 그거 곧 원서접수거든요.”
“벌써?”
“···2월이잖아요. 우리도 곧 개학이고.”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된 건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아윤이 공부는 어때.”
그렇게 돌아와선 안 될 답이 돌아왔다.
“좀 심각해요. 전 과목 40점대. 낙제점이야.”
“?”
한서림이 내 눈을 피하며 말했다.
“···아윤이, 공부 안 한 지 너무 오래됐더라. 공부 머리가 굳어있어.”
한서림의 입매가 꾹 다물렸다.
그 순간이었다.
달칵!
“아, 안녕하세요···!”
조아윤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왔다.
“사장님! 언니! 이, 이거 발렌타인 데이 선물이요···!”
머릿속에 어머님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간다.
-선생님! 우리 아윤이 꼭 합격하게 도와주세요!
경각심이 차올랐다.
‘아윤아윤아···.’
지금 초콜렛이 중요한 게 아니잖니.
위기의 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