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124
124화. 드워프
‘대수림에 드워프?’
굳이 수년 뒤에 있을 엘븐하임과 테르티우스의 전쟁이 아니더라도, 이 시점에도 엘프와 드워프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그런데 굳이 대수림에 온 드워프라니?
게다가 저 뒤를 쫓는 나무 괴물은 분명.
“……엔트.”
“엔트? 그럼 저게?”
“예, 나무의 정령들입니다. 저 드워프,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상황을 파악한 순간, 그들은 오히려 드워프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뿌리와 가지가 다리와 팔처럼 변형된 채 달려오는 4~5m 크기의 굵은 나무. 흔히 엔트라 불리는 수목의 정령들은 선택받은 소수의 엘프 사냥꾼들이 전사들 대신 전위처럼 사용하는 존재였다.
즉, 지금 쫓기는 드워프가 엘프들에게 무언가 큰 잘못을 했다는 뜻.
그런데 그런 생각까지 짐작한 듯, 짧은 다리를 부리나케 놀리며 달려오던 드워프가 그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해라고! 지금 저들이 오해하는 거야! 드워프라고 다짜고짜! 젠장!”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타이니 일행이 그를 도와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엘프 레인저들과 안 좋게 얽히면 일이 꼬인다.’
타이니는 다가오는 드워프를 위협할 생각으로 조용히 워해머를 꺼내 들었다.
그 광경을 본 드워프는 놀란 듯 눈을 부릅뜨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뭐 하는 거야!? 난 진짜 죄 없는 드워프라고!!”
“그거야 상대방 말도 들어 봐야 알지.”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드워프의 바로 옆으로 다시 화살 두 발이 쏘아졌다.
“으아악! 진짜!”
드워프는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지만, 타이니는 그것을 보며 오히려 눈을 빛냈다.
명사수로 유명한 엘프들이 아까부터 저렇게 활을 쏜다는 것은.
‘맞힐 생각이 없다?’
아무래도 엘프의 화살이 일부러 드워프를 맞히지 않은 것 같았다.
“으에에엑! 드워프 살려! 좀 도와 달라고!”
그래서 타이니는 달려온 드워프가 자신의 뒤로 쏙 숨어 버리는 것을 굳이 막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그리고 일단 상황을 중재하기 위해 최선의 수를 꺼내 들었다.
“월랑!”
“아우우우우우!”
타이니의 부름에 나타난 월랑이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하울링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 대처는 완벽하게 먹혀들었다.
“늑대의 정령?!”
놀란 목소리와 함께 드문드문 날아오던 화살이 그치더니.
쿵. 쿵. 쿵.
거대한 나무 거인들이 타이니 일행의 십여 미터 앞까지 다가와 멈춰 섰다.
“인간이 정령술사라니, 하…….”
나무 거인의 몸에 돋아난 넓은 이파리 사이에서 푸른 머리 엘프가 슬쩍 얼굴을 내밀었다.
“상인도, 사냥꾼도 아닌 것 같은데 대수림엔 무슨 일로……?”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타이니의 눈에서 빛이 났다.
‘대수림에서 굳이 저렇게?’
나무 정령의 가지 사이에 몸을 감추는 건 엘프 정령 궁수가 흔히 사용하는 전술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광야에서 마땅히 숨을 곳이 없을 때나 쓰는 방법이다.
수목의 정령은 그 특성상 기사나 몬스터에 비해 이동 속도가 상당히 느리기에, 몸을 숨길 공간이 많은 수림에선 굳이 저런 전법을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여태 화살을 일부러 빗맞히기까지 했다면.
“당신들, 그냥 이 드워프를 쫓아내려고 하는 거였군.”
“우리가 먼저 물었습니다, 인간 정령술사여. 대수림은 우리 엘프의 영역입니다.”
엘프가 그리 말하며 눈을 매섭게 빛내자.
“내게 맡겨 두게.”
옆에 있던 가렌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세계수의 자식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오른손으로 좌우의 두 발을 짚으며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고, 밑에서부터 명치, 머리로 이어지는 세로선을 그으며 자연스레 다시 허리를 세운다.
그리고 양어깨를 잇는 가로선을 그어 마무리하는 인사.
요새는 엘프들도 잘 사용하지 않는 세계수의 가호를 인간 기사가 선보이자 엘프의 눈이 절로 커졌다.
거기에 더해.
“우리는 엘븐하임에 볼일이 있어 이동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원치 않은 일에 휘말렸군요.”
품 안에서 하늘빛 머리카락 묶음을 꺼내 들기까지.
그것을 본 엘프는 일순 안색이 변하더니 그대로 정령의 가지 위에서 뛰어내렸다.
“친구의 증표……. 이 파장은 흠, 하루엘이군요. 이거 실례했습니다.”
‘머리카락에 무슨 파장이 있어?’
하늘색 머리카락을 만져 본 엘프의 말에 타이니가 새삼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경계심이 어려 있던 엘프의 얼굴은 어느새 푸근하게 바뀌어 있었다.
“늑대의 정령술사와 친구의 증표를 가진 기사라니, 이거야 환대를 할 수밖에 없군요. 대수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엘븐하임도 아니고 위험 가득한 대수림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말이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가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그럼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사정을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들의 뒤쪽, 허리께 높이에서 튀어나왔다.
“오해라고! 나는 그냥 괴물이 튀어나온 줄 알고 공격한 건데……!”
다급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 드워프.
그의 말에 따르면.
“엘븐하임에 가는 인간 상단에 껴서 야영을 하던 중, 불침번을 서다가 나무 괴물을 봤다? 그래서 공격했다?”
“그래! 그게 다야! 놀랄 만하잖아!”
드워프는 억울하다는 듯 소리를 질렀지만.
“저 드워프가 엄청난 마법 불길을 쏟아 내는 공격으로 우리 정령 중 하나를 역소환시켰습니다. 덕분에 동료가 크게 다쳤지요.”
“그, 그건 미안하다고 말했잖아!”
“애초에 대수림에서 화염 공격이 가능한 마법 무기를 소유하고 있는 것 자체가 경고 대상입니다. 그 상황에서 저자는 무구의 압수를 거부하기까지 했으니 쫓아내려 한 것뿐입니다.”
엘프의 눈빛을 따라 시선을 옮겨 보니, 작은 드워프의 팔에 두툼한 완갑 같은 것이 달린 게 보였다.
‘아티팩트라고?’
그냥 완갑이라기에는 손목 앞으로 돌출된 구멍이 조금 특이해 보이는 물건.
“핸드 캐넌은 내 역작이라고! 달란다고 줬다가 순순히 돌려받는다는 보장이 없잖아! 엘프랑 우리 드워프가 사이 안 좋은 거야 온 세상이 다 아는데!”
‘그걸 아는 너는 대체 왜 엘븐하임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렇게 딴지를 걸고 싶었지만, 타이니는 우선 드워프가 내뱉은 다른 말을 물고 늘어졌다.
“아까는 오해라며? 여기에 오해의 여지가 어디 있지?”
“그, 그러니까…… 내가 숲에 해를 끼칠 거라는 생각 자체가 오해라는 거였다! 난 절대 그럴 마음이 없었다고!”
‘좀 뻔뻔한 것 같은데…….’
타이니가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움찔하면서 시선을 돌리는 꼴이, 꼭 잘못한 아이가 부모에게 혼날 때 모습 같았다. 심지어 남자 드워프답지 않게 수염도 기르지 않은 탓에 영락없이 어린아이로 보였다.
타이니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는데, 딴 곳을 보던 드워프가 문득 타이니의 손에 들린 워해머를 보더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어, 어? 스탬프?!”
움찔.
“뭐?”
“그, 그거 내가 만든 건데!?”
“뭐라고!?”
“내가 아버지 집에 두고 온 내 무기! 스탬프! 우리 아버지 렌돌! 맞지!?”
“그럼 네가…….”
“그란돌! 그 망치 만든 사람이야. 그러니까 나 좀 도와 달라고!”
공교롭게 이어진 인연에 타이니는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저희도 당혹스럽지만, 인연이 있는 사람 같은지라 간섭을 안 할 수가 없겠군요. 어떻게 선처가 안 될까요?”
가렌이 다시 나섰고, 그 말을 들은 엘프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친구의 증표를 가지고 있는 분이라면 믿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무기를 다시는 안 쓰겠다는 다짐을 받아야겠습니다.”
“무, 물론이지! 그럼! 절대! 난 엘븐하임에서 물건만 구하면 된다고!”
연이어 강조하는 그란돌의 목소리가 더욱 못 미더웠지만.
“……믿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엘프들은 가렌의 얼굴을 일견하고는 그대로 물러났다.
그 직후.
“허으으, 다행이다. 고, 고마워. 인간.”
그란돌이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감사의 인사를 하는데.
“별말씀, 음?”
엘프가 사라진 방향에서 다시 수많은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엘프가 거짓말을?’
당혹스러운 마음에 황급히 전면을 바라보는데.
– 저쪽에 불빛이 있다!
– 엘프들은 안 보여!
– 그란돌 님! 무사하십니까!?
일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가온 무리는 5대의 커다란 짐마차를 끌고 있었기에 한눈에도 상단임을 알 수 있었다.
이내 선두에 있던 노년의 상인이 불빛 속으로 다가왔다.
“오, 그란돌 님! 무사하셨군요. 죄송합니다. 저희가 엘프들과 다짜고짜 척을 질 수가 없는 상황이라…….”
“아니, 아니야. 상황은 이해하지. 뒤따라 와 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뭘.”
노상인의 존대에 어린아이 같은 드워프의 반말.
하지만 실제로 무려 4~500년을 살아가는 장생족인 드워프는 150세에 달해야 겨우 성년으로 인정받으니, 그 사정을 알고 보면 그리 어색한 광경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뒤에선.
“뭐야? 둘이서 대수림에?”
“대단한데?”
“심지어 인간이 늑대를…….”
짐마차의 주변을 호위하던 상단 호위 무사인지 용병인지 모를 이들이 타이니와 가렌을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어디서 느껴 본 기세 같은데.’
“어?”
가렌이 노년의 상인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타이니의 어깨를 툭 치더니, 상단의 깃발을 가리켰다.
“독수리?”
그 문양을 본 타이니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짐마차에 달린 깃발은 상단이 귀족의 휘하임을 뜻하는 것.
그런데 그 문양이 독수리라면, 떠오르는 가문은 적어도 아스란 제국 내에서는 하나밖에 없었다.
거기에 더해.
“날 구해 준 은인들입니다. 인사하시죠, 상단주. 거기 은인들, 당신들도 알지 않아? 내 아버지가 있는 영지 상단인데?”
그란돌의 그 말이 추측에 확신을 더해 주었다.
“역시…….”
결정적으로.
“이거 오랜만에 뵙습니다, 타이니 경.”
생전 처음 보는 노인이 그에게 아는 척을 해 오는 것까지.
“누구……?”
그에 타이니가 의문을 표하자, 노인이 여행자용 로브를 젖히며 검은 독수리패를 꺼내 들었다.
“접니다, 상인 제이. 기억을 못 하시다니 꽤 섭섭하군요.”
블랙윙의 실질적 수장, 제이가 이번에는 노인의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 * *
“그러니까, 카룬의 일이 끝나자마자 상단을 준비했다고?”
“못 들으셨습니까? 아시는 줄 알았는데?”
어이없다는 타이니의 표정에, 제이가 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응수했다.
그러자.
– 카룬의 일이 끝나면 엘븐하임으로 가라. 어떻게든 들어갈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어 볼 테니.
황궁의 재앙이 있기 전, 카룬에 갈 때부터 들었던 검제의 말이 떠올랐다.
“그게 이걸 말한 건가? 아니, 그 양반은 왜 다시 한번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은 거야? 그리고, 설마 이것 때문에 상단도 만들었어?”
아마 그 말을 검제가 들었다면, ‘왜 다시 말해야 하지? 네 머리가 나쁜 것을 탓해라.’라고 했겠지만.
다행히 제이는 썩은 미소를 날리면서도 대답은 곱게 해 줬다.
“만들었다기보다는, 이미 있는 상단의 명의를 빌린 거지요. 물건도 다 진짜입니다. 정말 대륙 끝에서 끝까지……. 이게 무슨 개고생인지.”
노인, 제이가 푸념하며 째려보는 눈길에 뜨끔해진 타이니가 티 나게 시선을 회피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의문은 생겼다.
“엘븐하임에는 어찌 들어가려고?”
“들어가진 못해도 거래는 할 수 있지요. 엘프들도 인간족의 생필품들은 좋아합니다.”
“그걸로 정보 수집이 돼?”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이 무엇인지, 그 양은 어느 정도인지만 봐도 내부 사정이 얼추 읽힙니다. 엘븐하임 밖에는 인간 상인들의 쉼터도 있으니, 정보를 알아보는 것이야 쉬운 일이지요.”
그 말에 타이니는 새삼 감탄스러운 눈으로 제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팔리는 물건으로 상황을 읽는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몰라도, 그 확언에서 분명한 자신감이 느껴진 것이다.
“……대체 못 하는 게 뭐야?”
“싸우는 거요.”
무심결에 나온 감탄에 바로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한 제이의 표정을 보고 피식 웃은 타이니는 그저 두 손을 들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은 의문은 있었다.
“아, 근데 저 드워프, 그란돌은 대체 어디서 만난 거야? 드워프가 엘븐하임에 무슨 볼일이 있다고?”
엘프들이 다른 사대 종족 중에서 유일하게 교류하지 않는 것이 드워프족이었다.
나무를 땔감으로 쓰고 산맥을 파서 광산을 짓는 드워프와, 정원사나 파수꾼 역할을 하는 엘프의 관계는 생리상 천적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 드워프가 엘븐하임에 가 봤자 좋은 꼴을 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대수림에 들어오기 직전에 만났습니다. 궁극의 무기를 만들기 위해 세상을 떠돌며 재료를 모으고 있다고 하더군요. 렌돌 님과의 인연도 있으니 모른 척할 수가 없었습니다.”
“뭐?”
그 엉뚱한 소리에는 실소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