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78
078화
“저, 혹시 왕자님, 방금 하신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은 없지요.”
“…네. 아주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압니다, 라뷘 선생님.”
카일은 못마땅한 얼굴로 라뷘을 보았다.
“그래서 제 질문에 대한 답은 뭡니까?”
라뷘은 어색하게 웃었다.
라뷘은 셋째 왕자를 가르치는 선생으로, 그리고 제3 서고에 기거하는 학자로서 궁내에서 존경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존경을 받고 있다고 해서 그 지위가 높은 것은 아니다.
이미 세자는 첫째 왕자인 바센 라크 오라즌으로 정해져 있다.
카일이 세자가 된다는 건 바센을 폐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해석에 따라서는 언급하는 것만으로 모반이 될 수도 있었다.
‘까딱 잘못하면 향냄새 맡게 생겼구나.’
하지만 라뷘은 이상하게도, 겁이 나면서도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라뷘이 말했다.
“저, 어려운 질문이라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압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질문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을 했지요.”
“…왕이 되고 싶으신 겁니까?”
카일의 시선이 다시 안뜰로 향했다.
“되고 싶냐고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왜 그런 질문을 하신 겁니까?”
“어쩌면, 제가 왕이 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네?”
라뷘은 카일의 말에 반문했다.
왕이 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왕이 되면 좋겠다고 하는 건 얼핏 보아서는 아귀가 맞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라뷘은 카일의 말에 주어가 빠져 있다는 걸 알았다.
라뷘이 질문했다.
“누구에게 좋다는 겁니까?”
카일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답했다.
“백성들에게요.”
─┼
언제 마지막으로 사람의 손이 닿았을지 모를 흰 눈으로 덮인 설산.
그 꼭대기에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바닥을 뚱하니 내려다보고 있다.
르나르들의 신 룬다였다.
룬다가 화상 채팅창 너머에서 말했다.
“…여기까지가 대강의 보고야. 자세한 건 공유한 정보로 봐.”
“그러지.”
“근데, 네뷸라.”
“뭐야?”
“부탁 하나 해도 될까?”
“일단 들어는 보지.”
“…한 수만 물러 줄래?”
성운은 안 될 것 없다는 듯, 과장된 동작으로 바둑판 위에서 백돌 하나를 물렀다.
지난 일백여 년 동안 성운은 고대 유적을 발견하고 흉물과 흉신을 죽이며 여러 가지 소영역을 얻었다.
그중에는 나무의 소영역과 자갈의 소영역이 존재했다.
기적으로 바둑판을 만드는 것 정도야 쉬운 일이었다.
룬다 또한 마찬가지라서, 자갈의 소영역이 아닌 보석의 소영역으로 돌들이 루비와 파란 사파이어로 반짝이고 있긴 했지만 역시나 바둑판이었다.
화상 채팅창을 끼고 서로의 바둑판을 들여다보며 원거리 게임을 두는 것이었다.
성운은 황야의 한 복판, 햇볕이 내리쬐는 메마른 땅 위에 앉아 있었다.
성운의 뒤로는 정물이라 할 것도 없어서 오래전에 죽은 물소의 앙상한 머리뼈만이 오도카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룬다가 흑돌을 옮기며 말했다.
“요즘은 뭐 재미있는 일 없어?”
“오, 이쪽 정보도 캐 보겠다는 건가?”
“모든 걸 게임이랑 엮는 건 그만둬 줄래? 이건 그냥 스몰토크라고. 안부 인사의 연장선이지.”
성운은 모두가 자신처럼 게임에 진심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때마다 조금 서운한 감정이 생기기도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어차피 알게 될 이야기긴 한데.”
“뭐야?”
“변화가 생길지도 몰라.”
“드디어?”
룬다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룬다는 변화라는 단어에 기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 백여 년은 정체기였다.
이른바 중세라고 할 만한 시기에 접어들면서 국가 간의 국경은 큰 변화가 없었다.
지엽적인 전투가 발생하더라도 큰 전쟁으로 비화되지는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은 정체기는 로스트 월드에서 필연적이긴 했다.
로스트 월드에선 빌드에 따라 초기에 확장 정책을 계속 밀고 가서 게임을 어떻게든 끝내는 방식도 존재했지만, 일반적인 빌드에서는 어느 정도 국경선이 정해지면 내정을 다지게 되었다.
이를테면 초기 확장에 사용했던 주요 종족 이외에도, 자신의 나라 안에 있는 종족들을 플레이어의 신도로 끌어들이는 등 여러 가지 유화 정책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내적으로는 각 종족들이 겪는 많은 문제들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성운만 하더라도 역사에 뚜렷한 흔적이 남지 않았을 뿐, 여섯 번의 반란을 저지했다.
그야말로 적이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었던 것이다.
필요하다면 더 유능한 캐릭터를 앞세워 왕조를 교체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만, 성운은 라크락과 자올의 DNA를 믿었다.
‘유능한 아버지와 유능한 어머니 사이에서 유능한 자식만 나오는 건 아니지. 유전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으니까.’
그리고 군대를 움직이는 전쟁이 아닐 뿐, 플레이어 간 싸움은 계속 되고 있었다.
‘아마 흑린의 여섯 번의 반란 시도 중 네 번 정도는 다른 플레이어가 일으킨 걸로 보이니까.’
당연히 성운도 다른 나라의 궁정을 노린 여러 가지 내분을 유도했다.
결과는 그럭저럭 성공이라고 할 만했다.
사티로스의 나라 단염과 닉스의 나라 금안의 왕, 그리고 절반 정도의 귀족이 친 흑린파였다.
이 두 나라는 과거 라크락에 의해서 사실상 직접적인 도움을 받은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피와 썩은 고기의 신은 악신으로 제3 대륙 전체에 그 이름을 알렸었다.
그리고 악신의 하수인인 샤이븐 또한 마왕이라는 칭호로 남아 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는데, 그 악신을 죽인 라크락의 영향력도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라크락이 악신을 죽일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이 모두 흑린으로 귀화한 것도 그 영향력에 힘을 실어 주었다.
라크락이 구해 낸 노예들은 당연한 것이지만, 뱀파이어들마저도 도망치는 샤이븐을 잡아 죽이고 그것을 리자드맨들에게 바쳤다.
리자드맨들은 그 자리에 있던 뱀파이어들의 항복은 받아들였다.
하지만 어느 종족이라 하더라도 뱀파이어와의 공생은 불가능했다.
뱀파이어는 사람의 피를 마셔야 했다.
다만 가장 저급한, 이른바 4세대 뱀파이어들은 동물의 피로 버틸 수 있긴 했지만 2세대나 3세대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자 뱀파이어들은 놀라운 선택을 보여 주었다.
라크락과 야천의 뜻에 따라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살 수는 없다며 굶어 죽기를 고수한 것이다.
리자드맨의 산성 가까이 무려 1천 명의 뱀파이어들이 각자의 석굴을 파고 들어앉았다.
리자드맨과 여러 종족들이 그들이 정말로 뜻을 이루는지 보았다.
몇몇 뱀파이어들은 뜻을 저버린 채 도망쳤고, 또 몇몇 뱀파이어들은 유혹을 참지 못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무려 6백여 명의 뱀파이어가 앉은 자리에서 목마름이라는 고통을 참아 내고, 죽었다.
리자드맨들은 그들의 진심을 뒤늦게 확인했다.
자올이 그 계곡에서 야천에게 올린 기도가 후대에 전해졌다.
“푸른 벌레신이시여, 비록 죄 지은 이들이나 그 죄를 자각하고 스스로 벌을 받을 줄 안다면, 이를 딱히 여겨 용서하실 줄로 압니다.”
그러자 푸른 나비가 자올의 주위에 뱅뱅 돌았다.
자올은 깊이 절하며 말했다.
“저는 이미 이들을 용서했나이다.”
이후 많은 이들이 리자드맨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비록 죄를 지었더라도 참회하고 스스로 벌을 받는다면 야천이 포용한다고 알려졌다.
뱀파이어들이 죽은 그 지역은 ‘좌불곡(座佛谷)’으로 불리며 야천교의 성지 중 하나가 되었다.
덕분에 해당 성지와 접하고 있는 사티로스들, 그리고 뱀파이어에게 완전히 궤멸을 당했다가 겨우 복구에 성공해 낸 닉스들은 리자드맨들을 좋게 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코볼트의 나라 만굴은 뱀파이어의 영향력도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으며, 트롤의 나라 석면은 자신들의 힘만으로도 나라를 지킬 수 있었을 거라 믿어 친 흑린파가 그리 득세하지 못했다.
‘그리고 르나르의 나라 적과는…‘
생각하던 성운은 룬다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내 말 안 들려?”
“뭐라고 했지?”
“무슨 변화가 생기는지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니까.”
성운은 고개를 들고 룬다를 바라보았다.
“그럴 생각은 없는데?”
“…아, 그래. 이번 판 이기면 말해 줘.”
“그럴 생각 없다니까. 그리고 넌 뭘 걸 건데?”
“아주 생각이 없는 건 아니라는 거지? 뭐가 좋을까…”
“내 부탁 하나 들어줘.”
그 말에 룬다는 흠칫했지만, 곧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
30분 뒤, 룬다는 바둑판을 뒤집었다.
“야, 집어치워. 알까기로 해. 너 이쪽으로 와. 아니지, 내가 그쪽으로 갈까?”
“룬다 님, 결과에는 승복하셔야지요.”
그렇게 말한 것은 성운이 아닌 엘다르였다.
엘다르는 화상 채팅창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 앉아 있다가, 룬다가 게임 판을 뒤집자 고개를 빼꼼 내민 것이다.
지난 백여 년 동안 이미 셋은 사실상의 느슨한 동맹 관계가 되어 있었고, 룬다의 경우에는 크람푸스에 대한 첩자가 되어 있었다.
“뭐야? 넌 거기 왜 있어?”
“룬다 님만 지루함을 느끼는 건 아니니까요.”
그러면서 엘다르는 성운과 자신 사이에 있던 체스 판을 들어 보였다.
룬다는 성운의 손이 한쪽으로 꿈지럭거린다고만 생각했지 또 다른 게임을 하고 있었단 걸 상상하지 못했다.
“아니, 네뷸라. 너 지금 나랑 엘다르 동시에 두고 있었던 거야?”
성운과 엘다르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자존심 상해. 안 할 거야.”
“가려고?”
“흥이다.”
룬다는 혀를 살짝 내밀고 가운데 손가락을 펼쳐 보여 주곤 화상 채팅을 종료했다.
엘다르가 말했다.
“그래도 네뷸라 님, 저는 좀 궁금한데요.”
“변화의 조짐 말이야?”
“네.”
성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체스 판으로 향했다.
엘다르는 한숨을 쉬고 자신의 왕을 쓰러트렸다.
“체스도 내가 이긴 거 같은데?”
엘다르는 큰 눈으로 하늘을 살짝 바라봤다.
“그래도 내기를 한 건 아니니까요?”
성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엘다르와 룬다는 처지가 조금 달랐다.
룬다는 성운이 보기에 이중 첩자였다.
그래서 정보를 일방적으로 받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반면 엘다르의 엘프는 거의 흑린 소속이라고 볼 만했다.
북해안의 엘프들은 이제 나름의 영역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지만, 휘경과 맺었던 백여 년이 넘는 여러 가지 계약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흑린의 도움 없이는 성장하기가 힘들었다.
그 때문에, 엘프들은 리자드맨 때문에 겪었던 고난조차도 자신들의 신께서 의도한 필연적인 고난으로 잘 포장했다. 엘다르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포기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엘다르의 엘프들 중 일부가 이미 흑린의 궁에서 신하와 좌수관으로 일하고, 엘다르의 대사제가 만든 교리 또한 야천을 함께 믿는 것이 큰 문제가 없다고까지 결론을 내렸다.
성운은 이제서야 엘다르와의 실질적인 동맹에 대해 생각해 봐야겠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엘다르는 이미 성운을 게임 끝까지 함께할 동맹으로 생각 중이었다.
성운은 아무런 탈이 없겠다는 확신을 한 뒤에 말했다.
“좋아, 이걸 보자고.”
성운은 창을 열어 오라즌의 궁을 비추었다.
엘다르의 시선이 창으로 향했다.
“변화의 조짐은 이거야.”
라크락이 가리킨 곳에는 열댓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리자드맨이 앉아 있었다.
엘다르도 얼굴을 보긴 했던 캐릭터로, 현재 흑린의 왕인 안평왕의 셋째 아들이었다.
엘다르는 셋째 아들인 만큼 별다른 신경을 안 썼기 때문에 의아했다.
“이 개체에게 무슨 특별한 것이…?”
성운은 그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능력치도 한 번 안 봤었나?”
“예.”
“뭐, 스킬이 붙거나 하는 특별한 점 없어. 단지…”
성운은 카일의 상태창을 띄웠다.
엘다르의 눈동자가 커졌다.
『카일 라크 오라즌(Lv.0)
힘 14
지능 107
사회성 32』
레벨0으로서는 불가능이나 다름없는 수치가 적혀 있었다.
“지능이 엄청 높을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