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20
미신 문제가 다시 소비에트 총회의로 넘어가서 대강 정도만 지나치지 않으면 봐주는 걸로 결론이 날 때까지 에드워즈는 며칠이나 속을 썩여야만 했다.
총회의에서 개인 숭배만 엄금하라는 지시가 다시 내려오자 레닌과 트로츠키, 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시발 스탈린 신당까지 때려부수기만 하면 됐으니 일이 반의 반으로 줄어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니 스탈린 관련해서는 역사왜곡까지 하면서 잔뜩 음해해 놨는데 왜 신당이 생기지?
대체 이해를 할 수 없어 나중에 알아보니 스탈린은 일종의 재앙 신으로서 섬기고 있었다고 한다.
스탈린 신에게 공물을 넘기면, 그가 적당히 만족해 다른 누군가를 숙청할 것이라는··· 아니 됐다. 그에게 전근대 민간신앙의 세계는 감당하기 너무 벅찼다.
만약···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트로츠키 개새··· 아니 트로츠키 동지의 연극 상연 사업안을 괜찮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의 모가지를 비틀어 주리라.
아무튼 그렇게 고생에 고생을 거듭한 끝에.
“이번 회의에서는 삼식, 박돌, 막동··· 순으로 수차 건설에 임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점순 동지가 제안한 다음 안은 포테토 수확기의 역할 분담 건입니다. 본격적 논의에 들어가기 앞서···”
해냈다. 내가 해냈어! 난 조직의 천재다! 나는 무적이고 17호 농민 소비에트는 신이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멀쩡히 회의가 돌아가고, 훌륭하게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과정을 보고 나서 밥 에드워즈는 당장에라도 눈을 감아도 좋을 만큼 정서적 충만감에 차 있었다.
전근대의 농민들이 낯설기 짝이 없을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에 적응해가고··· 사회주의라는 사상을 겉핥기 수준으로라도 알게 되었으며··· 아예 끊어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람이 굶주리는 와중에 귀신을 섬긴다고 상다리 부러지도록 제사를 지내진 않는다….
바로 이런 것. 사회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자신이 스페인으로 향했고, 조선에 왔으며, 이렇게 소비에트의 건설에 자임한 것 아니겠는가?
뜨듯하고 뿌듯한 감각이 에드워즈의 가슴속을 후벼오며 감동을 주었고, 그렇기에 뭔가 중요한 게 빠졌다는 사실을 에드워즈가 눈치 채는 것도 잠시 후로 미뤄졌다.
잠깐, 내가 왜 소비에트 조직 담당을 자원했더라?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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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 사회의 쓴맛을 본 적 없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서유럽인들.
일전에 자신에게 ‘민주주의적이고 혁명적인 전술’ 따위를 운운하던 에릭 블레어나, 지금 뭣도 모르고 조선인들을 의식화하겠다며 소비에트 조직에 뛰어든 메리먼과 에드워즈 같은 영구혁명파들 모두 전근대적인 사회를 제대로 접해본 적 없는 이들이다.
트로츠키는 별 생각없이 소비에트 건설에 자원한 이들을 떠올리며 웃음을 흘리다가, 알맞게 식은 찻잔을 들어올렸다. 이제 잔에 들어 있는 것은 홍차와 우유가 아닌 근처에서 급하게 따다 말린 꽃잎이지만. 뭐, 그런대로 트로츠키의 입맛은 환경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저들이 개고생을 하며 소비에트를 일궈놓는다면 고마운 일이고, 장한 업적이지만. 과연 영구혁명파들이 원하는대로 농민들이 호전적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될까?
전근대 농민들을 제대로 된 병사들로 바꿔 놓기 위해 적백내전 동안 트로츠키가 흘린 피의 양을 생각해보자면··· 답은 ‘글쎄올시다’일 테다.
물론 그들도 그렇게까지 나이브하진 않았으리라. 그냥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세력 기반을 다져 놓으면 이후에 언제든 쓸모가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겠지만···.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면 조선의 정난도 안정되어가고 저들이 목놓아 부르짖던 ‘혁명을 위한 천재일우의 기회’ 따위 곧 지나가고 말 것이다.
역시, 저런 이들이 주장하는 전쟁에 무턱대고 가담하다간 아까운 피만 흘리게 되었으리라. 올바른 선택을 내렸다는 생각에 트로츠키는 다시금 미소를 지으며 꽃잎차를 한 모금 빨아 마셨다.
“저기··· 저희를 부르신 데는 역시 이유가 있으실 것 같습니다만.”
“크흠, 아 미안하오. 블레어 동지, 로 동지.”
물론 ‘영구혁명파’의 모두가 무턱대고 소비에트를 건설하고 농민들을 계몽시키겠다면서 바보같이 달려든 것은 아니다.
우선, 지난번에 트로츠키 자신이 온 힘을 다해 설득하고 꾸짖었던 에릭 블레어.
그는 역시 정치적 성향상 조선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솔깃했던 듯싶으나,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기보다는 그들의 의견 개진을 지원하고 응원하는 데 그쳤다.
또한 지난 트로츠키주의자 숙청 당시에 나누었던 대화 때문인지 조선인 소비에트를 조직하는 사업에 힘을 낭비하지 않고, 영구혁명파를 지지하는 이들을 다독이고 논리를 점검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과연, 이곳에 온 지 1년여 되는 기간 동안 그나마 성숙한 모습을 엿보이는 것을 보면 진작에 가까이 두기를 잘한 것 같다. 아직까지도 민병대 어쩌구 헛소리를 하면서 떽떽댈 블레어를 상상하니 두통이···.
다른 한 사람은 올리버 로. 역시 메리먼과 함께 미국 공산당원들을 중심으로 한 인맥을 이끌며 영구혁명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메리먼이 에드워즈와 소비에트 건설 사업에 뛰어든 것과는 다르게 기존에 미국인, 그것도 흑인계 중심으로만 뻗어 있던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더 넓은 범위로까지 확장시키는 수완을 보여주었다.
아마 어린 시절을 낙후된 텍사스 깡촌의 흑인사회에서 부대끼며 보내서 그런지 전근대, 그것도 산업노동자도 아닌 무리를 조직화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알아챈 것으로 추측된다.
그 역시 눈여겨보아야 할 인물임에 틀림없다.
아무튼 이들로 인하여 영구혁명파의 주장이 아직도 설득력을 가진 의견으로, 논해볼 만한 토론거리로 여론에서 떠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영구혁명파의 정치적 역량 또한 이들의 안배로 인해 생각한 것만큼 많이 소진되지는 않았다.
물론, 이제 이들의 주장을 그냥 뭉개고 넘어가도 좋을 정도로 세력이 축소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수만 명을 넘지 않는 이 작은 사회에서 괜한 분란거리를 남기고 가는 선택지는 고르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오.”
그렇다면, 영구혁명파에게 차선책을 제공한다.
트로츠키가 넘긴 것은 원산 근방의 지도, 그런데 구획들이 나눠진 모습을 보니 조선의 행정구역과도 사뭇 다르다.
“원산 주민들과 유랑민들, 그리고 척후병들의 정보를 받아 그려진 주위의 지도요. 생활권별로 구획을 나눠 놓았으니 한번 살펴 보시오.
여기에 쓰여진 숫자는, 파견할 인력의 숫자요.”
“···뭘 위해 파견하는 인력입니까?”
“혁명.”
혁명. 그 단어에 블레어와 로가 흠칫, 몸을 움직이며 긴장하자 트로츠키는 너털웃음을 짓는다.
“허허, 혁명이라고는 했으나 세력화에 가깝겠군. 일전에 진행했던 첩보 작전에서 형성된 현지 협력자들과 지역의 분위기 또한 기록되어 있소. 이곳에서 소비에트들을 조직하고 사회주의를 퍼뜨리며 농민들을 의식화하기 위한 기획을 진행할 것이오.
만일 전란이 진행된다면, 주위의 정세도 심상치 않게 돌아갈 것이니 인근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해놓는 과정이 중요하리라 생각되오.
이는 그를 위한 준비요. 만일 상황이 알맞게 돌아간다면 이 지역들을 점령하고 우리의 세력을 확대할 수도 있겠지.”
“그래서 우리가 얻는 게 뭡니까?” 로가 회의적으로 묻자 트로츠키 바로 답한다.
“바라던 만큼의 수준은 아니겠지만 이건 그대들이 바라던 혁명의 확대요. 마침, 지금 당신네 인사들도 조직가로서의 훈련과 경험은 거쳤겠군.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소위 ‘영구혁명파’의 역량 보존에도, 앞으로의 정책적 방향성을 정하는 데에도 그나마 유리할 것이오.”
로와 블레어는 트로츠키의 제안 속 숨은 대가를 눈치챘다.
결국, 트로츠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영구혁명파는 인근에서의 조직화에 힘쓸 뿐 조선 전역을 향한 선전포고를 주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상당수 인력이 원산 외부로 빠져나갈 테니 총회의에서의 영향력도 축소될 것이고.
그러나··· 이 정도면 받아들일 만한 합의안 아닌가?
블레어는 슬며시 로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로 또한 블레어를 흘깃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결정만이 남았군.’
블레어가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좋은 판단이오.”
트로츠키가 웃으며 두 사람에게 악수를 건넨다.
“동지들, 미래는 우리의 것이 될 것이오!”
그렇게 덕담처럼 트로츠키는 이야기를 건넸다.
그러나 트로츠키도, 로도, 블레어도, 원산의 그 누구도.
정작 누구도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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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라는 바람 (5)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영구혁명파의 모두에게 트로츠키의 제안이 흘러 들어가고.
소비에트의 조직화가 슬슬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정남은 떨리는 마음으로 보트에 올라탔다. 내륙 지방 출신이니 애초에 바다가 낯설고, 배가 낯설기도 했지만. 그 때문에 가슴이 이렇게 오그라드는 것은 아니었다.
옆을 돌아보니 어촌인 원산의 선주민일 이들도 그와 함께 조마조마한 듯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가?
“하나, 둘, 셋··· 열여덟 열아홉, 스물. 흠, 다 탄 것 같군요.”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와아아아아아!”
등 뒤에서 따가울 정도로 열정적인 환호성이 들려온다. 그리고 그 속에는 자신이 속한 제17 농민 소비에트의 구성원들도 끼어 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잔잔한 파도가 보트의 옆구리를 톡톡 치는 것도, 괜시리 새들이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것도 모두 하나의 계시처럼, 응원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짧고 긴장된 항해가 이어지면서, 원산현 앞바다를 떠노는 작은 섬들을 지나친다. 바다의 고랑이 점점 깊어지고 물빛이 푸르게 변한다.
그렇게 신도(薪島)에, 그리고 그 옆에 정박한 세 척의 배에 가까워진다.
언제나 정남은 멀리서, 아주 작은 검푸른 점으로 보이는 이 배를 내다보았다. 신기한 총통들을, 처음 보는 사람들을, 그리고 사회주의라는 것을 실어왔다는 배들이 어떤 모습일지, 얼마나 클지에 대해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정남이 생각했던 가장 큰 크기보다도 훨씬 배들은 커 보였다.
“도착했습니다!”
“승선한다! 끌어올려!”
“밧줄! 밧줄을 내려!”
그렇게 실랑이가 몇 번 이어지더니, 굵직한 줄들이 내려와 보트에 걸리고는 보트를 통째로 해수면 위로 들어올린다.
“윽···으악!”
정남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지만 부끄럽지는 않았다. 다른 조선인들도, 그만큼 놀라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작다란 아기새를 부리로 물어 둥지에 옮기는 어미새처럼, 거대한 철선은 사람이 스무 명 넘게 탄 보트를 가볍게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둥둥 떠다니길 몇 초, 배의 갑판이 들여다 보이는 높이까지 올라오자 비로소 보트를 끌어올리던 도르래는 작동을 멈췄다.
그렇게 뱃사공과 안내원의 부축을 받아 한 사람, 한 사람씩 거대한 배의 갑판을 밟는다.
마치 육지 같은 단단함. 정박 중이라지만, 아까의 작은 보트와는 다르게 미세한 흔들림조차 느낄 수 없다.
정남은 가만히 갑판을 내려다보았다. 올라온 높이가 길었던 만큼 이 갑판 아래로 빼곡하게 공간들이 들어차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천의 사람들을, 수만의 무기와 식량을 싣고 온 바로 그 철선이다. 거대한 뱃속에 완전히 다른 세계를 품고서 먼 이국 땅에서 이곳까지 날아왔다.
시골뜨기에게는 상상만 해도 아득한 웅장함이다.
그렇게 긴장으로 어질어질한 감각을 물리치고 겨우 안내를 받아 이동한 곳은··· 거대한 홀. 정남과 일행들이 마지막으로 도착한 것이었는지, 이미 홀에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다. 정남은 자신에게 배정된 두 번째 줄 열일곱 번째 의자를 찾아 착석했다.
“여기서 뵙게 되는군요.”
“아, 에드워즈 동지!”
자신과 제17 농민 소비에트를 지도한 로버트 밥 에드워즈가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다. 그렇게 밥 에드워즈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정남은 홀의 이곳저곳을 다시 눈으로 훑었다.
RMS 켈틱 1호는 원래 유람선이었으나 폐선 직전까지 가면서 내부의 웬만한 장식들은 모두 떼어낸 상태였다. 화려한 대리석상도, 도금된 금속 공예품도, 명멸하는 샹들리에도 이제는 없다. 한때 부유한 자본가와 귀족들을 날랐던 전성기와 비교하면 켈틱 1호의 홀은 초라하게 헐벗은 폐허나 다름없다.
그러나 정남의 눈에는 그 얼마 남지 않은 장식부터, 공간 자체의 크기가 주는 압도감까지 모든 것이 놀랍기만 했다.
그렇게 휘둥그래진 눈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정남과 조선인들의 시선이 멈춘 곳은 우뚝 솟은 연단.
그곳에 트로츠키가 서 있다.
‘저 사람이 바로 그 뿔 달린 스탈린에 맞서 싸운 그···’
···라고 생각하자 마자 옆에서 밥 에드워즈의 불타는 눈빛이 ‘시발 그거 아니라니까!’하고 외치는 듯 그를 노려보고 있다. 아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어떻게 안 거야?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트로츠키가 어느새 능숙해진 조선어로 던진 아주 짤막한 서두. 그러나 그것은 객석의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객석의 분위기는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활활 타올랐다.
“와아아아아아! 만세! 소비에트 만세!”
“원산 공화국 만세!”
그러다 갑자기 한 사람이 일어나더니, 노래를 불렀다.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 굴레를 벗어던져라!”
정남도 배웠던 노래,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따라부르자 정남도 일어난다.
그렇게 운을 떼기도 전에 회장이 어수선해졌지만, 그런 것에 당황하면 트로츠키가 아니다.
트로츠키도 조선어로 한 음절, 한 음절. 어색하게나마 합창의 대열에 따른다.
그렇게 노래가 모두 끝나고 이어지는 환호성.
“여러분들은 모두 인민의 대의자로서, 인민의 권력을 상징하는 이들로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여러분이, 우리가 모인 이 자리가 곧 사회주의의 상징이고! 사회주의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트로츠키가 이전보다 격정적인 몸짓과 말투로 말하자 다시 청중은 환호로 화답한다.
해냈다. 조선 전체를 포기했을지 몰라도, 적어도 원산만큼은 혁명의 열정으로 불타오른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끼며 트로츠키는 다시 외쳤다.
“이 자리에서! 선언합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의 성립을!”
“와아아아아아아!”
1453년 가을, 조선국 원산에서 소련이 건국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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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새로 뽑힌 소비에트 대표들까지 모두 한 자리에 모아 ‘소련’의 부활을 선언한 것까지가 블레어, 로 등 영구혁명파와의 거래 조건이었다.
현실적으로는 ‘원산 소비에트 공화국’이라는 하나의 공화국에 영역이 한정돼 있지만, 적어도 이후까지 확장할 여지는 남겨두는 것. 그것이 영구혁명파의 요구였다.
게다가 의용군 대부분도, 연극을 통해 소련의 성립에 대해 알게 된 조선인들도 소련이라는 국호에 대해서 모두 긍정적이었으니 일의 진행은 별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제1회 연방 소비에트 대회’에서 참가자들의 열정이··· 조금 지나쳤다는 점.
“예, 제8 어민 소비에트의 김남덕 동지의 발언권 신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뭐시야, ‘러시아 혁명가’에서 보니까 상투페테르부루크를 레닌그라드로 바꾸덥디다? 그러면, 우리도 원산을 트로츠키그라드로 한번 바꿔 봅시다!”
“옳소! 옳소!”
···아니다. 열정이 ‘많이’ 지나쳤다.
그렇게 졸지에 트로츠키그라드가 될 뻔한 도시명을 지킨 것은 기존의 의원들과 트로츠키의 눈물겨운 설득 덕분이었다.
뭐… 정남의 관점에서 보자면 왜인지 트로츠키는 좀 설렁설렁 반대 의사를 표했고, 다른 의원들이 열심히 발언을 하다가 잠깐씩 멈칫하면서 트로츠키 쪽을 흘끗흘끗 살펴본 것 같다만···.
아무튼 그에 따라 해당안은 무사히 기각.
“크흠, 아마 색목인 제현은 잘 모를지 모르겠으나, 이곳 해동 땅에서는 예부터 중원의 예를 본받아 뭇 성현들의 가르침을 존숭하고 그분들의 말씀을 널리 전하고자 하여 문묘(文廟)를 조성하여 경영하니···.
이로써 아래로는 백성들의 교화를 꾀하고 위로는 위정자들에게 성인의 말씀을 따르게 하여 나라 전체를 덕화하여 왔소. 그러므로···”
트로츠키그라드로의 개명 건 다음으로 대회를 휩쓴 의제는, 바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문묘 건립 사업의 안’이었다. 뭔가 동양의 전통 철학자 겸 관료라는 ‘양반(Yangban)’과 ‘선비(Sŏnbi)’ 출신들이 건립 사업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온 것.
이 제안은 나오자마자, 지식인 출신 의용군들의 열광을 이끌어냈다.
“뭐? 아니, 철학자를 모시는 신전이라고? 뭐야··· 멋지잖아?”
“마르크스와 인간 이성을 섬기는 의식? 이걸 어떻게 참습니까!”
특히 해당 안은, 뭔가 ‘동양적인’, ‘철학자 국가의’, ‘인간 학자를 섬기는’, ‘신전’이라는 지점에서 묘하게 뽕에 차버린 인사들이 많았기에 특히 물리치기 어려웠다.
“당신들 다들 로베스피에르 꼴 나고 싶소? 지금 제정신이오?”
트로츠키가 프랑스 대혁명 때 사이비 종교 만들던 사례를 언급하자 겨우 문묘를 향한 열기가 진압되었다.
열광적이던 이들이 인간 이성을 섬긴다느니, 뭔가 이상한 ‘최고 존재’를 숭배한다느니 하던 프랑스 혁명 당시의 괴종교와 ‘마르크스 신전’ 사이의 차이를 해명하지 못한 것이다.
아무튼 그제야 몇몇 인사들이 정신을 차려 해당 사업안도 반려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소련 부활’이라는 선언 속에서 묘하게 붕 뜬 분위기가 가라앉은 다음에야, 실질적인 정책 논의가 진행되었다.
가장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던 것은 부역(賦役) 문제.
정남은 머릿속으로 지난 농민 소비에트에서의 회의 내용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달에 일주일씩 부역은 말이 안 돼! 정남이, 자네가 좀 가서 말 좀 해주게.’
‘맞네, 맞어! 그리고 부역 시간도 줄이는 겸 해서 내가 안변에 사는데 적전천 수로 공사에 동원되는 게 너무 불편하니 이것도 어떻게든 해 주게나···.’
그렇게 전달해야 할 내용을 기억하고 막상 손을 들어 발언권을 신청하니···
너무 떨린다.
“예! 제17 농민 소비에트 내표 정남 동지의 발언권 신청 받았습니다.”
“어···그···.”
우물쭈물하는 동안 수백 명의 시선이 자기에게 쏠린다. 연극에서의 사설로 주로 익숙할 뿐 직접 만난 적은 손에 꼽는 트로츠키 또한 그를 바라보고 있다. 아니, 그, 저, 하려던 말이···
“부역 시간이 너무 깁니다요! ···그리고 거주지와 부역 업무가 너무 안 맞으니 단순히 지시받는 방식 말고 원하는 걸 고를 수 있는 쪽으로 바꿔 주셨으면 하는데요.”
일단 첫 문장은 기세 좋게 질러 놓고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지만 의외로 반응은 좋았다.
“부역 신청제라··· 충분히 고려해볼 만한 선택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부역의 내용들을 목록화하여 배포하고, 그걸 또 일일이 신청받고, 신청받은 업무들 간에 겹치는 게 없는지 확인하기 너무 어렵지 않습니까? 게다가 쉬운 업무에 신청이 몰릴 겁니다.”
“신청이 몰리는 종목은 업무 강도를 점차 늘리고, 희망자가 별로 없는 종목은 일을 줄이든 신청자에게 혜택을 주든 하면 오히려 업무간 균형이 맞춰지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한참동안 진행된 토론 결과, 부역 일자는 한 달에 일주일에서 한 달에 닷새로 하향조정되었고 신청제는 일단 보류 상태로 들어갔다. 그를 위한 행정적 역량이 너무 부족하기에 추후 재논의에 들어가는 것으로 결정.
“그렇다면, 박정남 동지의 안은 과반 이상의 동의를 얻어 가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