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862
01865 1865화
“그게 옳은 순서겠죠.”
“쉬운 문제가 아니니까 좀 시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계속 이렇게 대치하고 있으면 저희 마음이 급해질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서요.”
“그럼 물어보고 오세요.”
태수가 권하자 지제이는 다시 부족장에게 향했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보자 지제이가 부족장과 대화를 나누고 다시 다가왔다.
“저희가 부족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저희는 그렇게 피하면 그만이지만, 의료진들이 걱정되신다고 하시네요.”
“걱정 감사하고, 배려에 또 감사한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저들을 여기 두신단 말입니까?”
“텐트에서 쉬게 해야죠. 몇 명 안 되는데.”
“그건 진짜…….”
지제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지만 태수는 옅게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정말입니다.”
“…….”
“내일 아침에 밝음 모습으로 뵙죠. 아차차. 저들에게도 간단하게 얘기 좀 해 주고 가시면 안 될까요?”
태수가 부탁하자 지제이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간단하게 말해 주세요. 내일 아침까지 여기 있는 걸로 하고, 의료진들이 결정을 내리면 그에 따라 달라고요.”
“네. 그러죠.”
지제이는 대답을 한 후 목소리를 높여 뭐라고 말했다.
그러자 마시리 부족도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일단락되자 옴부르 부족민들은 부족장과 함께 자신들의 거처로 돌아갔다.
마시리 부족에게는 태수가 병동 텐트를 가리켰다. 그러나 그들은 모닥불을 더욱 크게 피우며 앉아 있었다.
더 이상 폐를 끼칠 수 없단 표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르완다는 현재 우기였다. 지금 모닥불을 피우는 나무도 반쯤 젖어 있어 불에 말려 가며 태우는 중이었다.
그런 모닥불이 따뜻할 리가 없었다.
거기에 밤이 깊어 기온도 많이 떨어져 쌀쌀했다.
태수가 한 번 더 다가가 텐트를 가리키고 자는 행동을 해 보였다.
말이 안 되니 몸으로 하는 표현이 가장 이해가 쉬웠다.
마시리 부족에서도 바로 알아들었지만 끝내 거부했다.
“고집하고는.”
태수는 웃는 얼굴로 한 소리 했다.
그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마시리 부족은 하얀 이가 모닥불에 비치도록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때 정민수가 상자 하나를 들고 다가오며 물었다.
“안 들어간다지?”
“그런가 봐.”
“거봐. 내 말이 맞잖아.”
“그런데 그건 뭐야?”
“이불.”
툭.
정민수가 상자를 내려놓았다. 그 속에는 파란색 모포가 담겨 있었다. 재난 혹은 구호에서 많이 사용되는 거였다.
정민수가 먼저 모포를 하나 자신의 어깨에 두르고 몸을 비비 꼬았다.
“음, 따뜻해.”
“표현하고는.”
“확실한 거거든? 잘 보라고.”
호언장담한 정민수가 어깨에 두른 모포를 풀러 가까이에 있는 마시리 부족민의 어깨에 둘러 줬다.
살짝 긴장하던 부족민은 모포의 따뜻함에 눈이 크게 떠졌다. 그가 뭐라고 말하자 다른 부족민들도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변했다.
정민수는 기회를 포착하고 그들에게 모포를 하나씩 나눠 줬다. 그리고 물과 간단한 간식도 함께 건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태수는 옅게 미소 지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이렇게 세심하게 신경 쓰는 건 역시 정민수가 최고였다.
마시리 부족민들이 따뜻해하는 걸 확인한 후에야 태수와 정민수도 텐트로 들어왔다.
거기에는 이선정 간호사를 제외하고 모두가 모여 있었다.
태수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
“이 간호사님은요?”
“환자 지켜보러. 새벽에 내가 교대해 줄 거고.”
서영우가 슬쩍 손을 들며 말하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보다 다들 좀 쉬셨습니까?”
“적당히 먹고 적당히 쉬는 중이었지.”
“무지하게 피곤하시겠지만 잠은 조금 미루시고, 얘기는 모두 들으셨죠?”
태수가 묻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되는 모함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치가 않고, 그렇다고 마시리 부족만 버릴 순 없는 노릇이고.”
“저 환자를 마시리 부족까지 옮기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까요?”
“지켜봐야 알겠지.”
끄덕.
다들 서영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특정한 검사 기계가 없는 터라 예측이 쉽지 않았다.
그건 태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저희가 텐트를 계속 옮겨 다니는 건 상당히 힘들죠.”
“당연하지.”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진료용 텐트를 조금 떨어진 곳에 설치하는 겁니다. 그럼 다른 부족들이 다가오는 게 거북하진 않을 거 아닙니까.”
“여기는?”
“우리가 휴식하고, 또 수술하는 용도로 사용해야죠.”
태수가 명쾌하게 답했지만 다들 표정이 썩 좋진 않았다.
스윽.
유병태가 꺼칠한 얼굴로 손을 들더니 태수에게 그 이유를 말했다.
“만약 여기에 저 환자가 있단 소문이 나면 다른 부족에서 수술을 받지 않으려고 할 텐데.”
“당장 아파 죽는 사람이 그럴 정신이 있을까?”
“…….”
유병태가 입을 다물자 도성민이 손을 들었다.
“그럼 저 환자를 부족으로 데려다 놓고, 하루에 한 명씩 가서 상주하는 건? 그렇게 되면 휴식 개념도 되고 좋지 않을까?”
“어?”
“왜, 이거 아니야?”
도성민이 커다란 덩치에 맞지 않게 슬쩍 뒤로 빼려 할 때였다. 태수가 얼른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거 나쁘지 않은데.”
“그렇지?”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태수가 모두에게 묻자 다들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나쁘지 않아.”
“그렇게 되면 우리가 덜 번잡하겠지.”
“다른 부족들하고 얼굴 붉힐 이유도 없고.”
비슷한 이유로 다들 수긍했다.
그사이 김혁권이 사이먼 기자에게 한국어로 나눈 대화들을 빠르게 정리해서 알려 줬다. 왕년에 통역사 출신이라 그런지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달했다.
그러자 사이먼이 영어로 물었다.
“그러면 난?”
“너 뭐?”
“아침마다 다른 부족에 차 타고 가서 먼저 살펴보기로 했잖아. 그건 어떻게 되는 거냐고.”
그의 말에 태수가 바로 대답했다.
“그건 계속 진행해야지. 민수야, 당장 수술해야 할 환자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데려와. 정 오지 않겠다면 협박도 해 보고.”
“그건 내가 좀 잘하지.”
“그럼 그렇게 정리하는 걸로 하고, 이제 우리도 좀 잡시다.”
태수의 말에 남자들은 얼른 자신의 야전침대에 누웠다.
“아이그.”
“으으으.”
잠깐 쉬었다고 해도 수술의 피로가 사라지지 않았는지 앓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울렸다.
그건 수술에 들어오지 않은 정민수와 이기준도 마찬가지였다.
수술이 안전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밖에서 신경을 많이 썼으니 피곤할 터였다.
그때 최소현 간호사가 인사하며 일어섰다.
“그럼 쉬세요.”
“최 간호사, 혼자 자야 되는 거 아니야?”
“이 간호사님한테 가려고요. 거기서 눈 좀 붙이고, 이따가 서 선생님 오시면 그때 텐트 가서 잘 생각이에요.”
“그래. 무전기 꼭 들고 있고.”
“여기요. 걱정 마시고 팀장님도 얼른 주무세요.”
최소현 간호사는 무전기를 들고 텐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텐트 안을 비추던 형광등을 껐다.
그와 동시에 텐트 속은 급속도로 고요해졌다.
드르렁.
벌써 코 고는 소리도 들려왔다.
태수도 야전침대에 누운 순간 엄청난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부스럭.
태수가 몇 번 뒤척거리자 옆에서 정민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히 뭔가 좀 석연치 않지?”
“그러게. 뭔가 이상해.”
“저쪽에서 우리한테 모든 걸 얘기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왜?”
태수가 묻자 어둠 속에서 정민수의 목소리만 들려왔다.
“그게 아니라면 몇 명만 특정해서 발병하는 경우가 없으니까.”
“모르지. 여긴 또 새로운 환경이라.”
“그렇기는 한데…….”
“일단 쉬자. 당장 어떤 문제인지도 모르는데 계속 거기에 매여 있을 순 없잖아. 우리 할 일 하다 그 증상이 나타나면 그때는 알아낼 수 있을 거고.”
태수의 말에 정민수가 수긍했다.
“그렇겠지.”
“그러니까 자자고. 내일 해야 할 일도 많으니까.”
“그래, 자자. 잘 자라.”
“너도.”
인사를 마지막으로 대화가 끝났다.
눈을 감은 태수는 편안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들이 있는 동안 어떻게 된 건지 알게 된다면 좋은 일이다. 그게 아니라면 태수로서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깊은 생각도 여기까지였다.
너무 피곤했다.
일단 하루를 마감하고, 새로운 마음과 맑은 정신으로 내일을 맞이하고 싶었다.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가 학교 어귀에 들어설 즈음이었다.
부아앙.
트럭의 다급한 엔진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야말로 엔진을 풀가동하는 듯 시끄러운 소음이 귓전을 선명하게 때렸다.
그 소리에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의 부드럽던 표정이 점차 굳어져갔다.
예감이 안 좋았다.
당연히 태수가 무거운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너무 빨리 돌아오는 거 같습니다.”
“그러게요. 혹시 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설마요.”
“그런데 왜 걸음이 빨라지세요?”
“불안해서요.”
대답을 마친 태수가 좀 더 바삐 학교 쪽으로 향하자 이선정 간호사도 마찬가지였다.
저 멀리 하얀 트럭이 학교로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트럭이 학교와 가까워져갈수록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의 걸음도 빨라졌다.
그런 두 사람이 의료천막에 도착할 무렵 트럭이 먼저 다가와 멈춰 섰다.
엔진소리를 들었는지 의료진들도 모두 나와 있었다. 트럭 뒤 적재함 앞에 다들 모여 있었고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가 허겁지겁 도착했다.
태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도성민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직 몰라. 병태야!”
도성민이 소리치자 적재함을 가린 천이 걷어지며 유병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응급환자, 이번에도 마시리 부족이야.”
“뭐야, 어제 또 무슨 일이 있었는데?”
“일단 환자부터.”
휙!
유병태가 가림막을 걷고 고정시키자 적재함 내부가 모두에게 보였다. 그 속에는 마시리 부족민이 몇 명 올라타 있었고 누군가 가운데 누워있었다.
마시리 부족민들은 가운데 누운 환자를 양팔과 양 다리를 잡아 번쩍 들어서 적재함 밖으로 나왔다.
“물러서!”
“뒤로, 뒤로!”
태수와 정민수가 얼른 좌우에서 외치자 몰려 있던 의료진들이 길을 텄다.
곧 건장한 부족민들이 환자를 내렸다.
햇볕으로 나온 환자의 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오른쪽 가슴에 나뭇가지가 꽂혀 피가 흐르고 있었다.
“헉.”
“이건 도대체 뭐야?”
그 모습에 모두의 눈빛이 급변했다. 심장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오른쪽 폐가 무사할 수 있는 위치가 결코 아니었다.
아직 피가 흐르고 있는 걸 보니 부상을 입은 지 오래 되지 않았다.
태수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하루만이다.
죽을 고생해서 한사람을 살리니 또 한명의 중환자가 나타났다.
그때 유병태가 태수에게 재빨리 브리핑했다.
“사냥을 나갔던 모양이야. 밤새 쳐놓은 덫을 확인하다가 줄이 끊어져서 이 사람이 당한 거고.”
“줄?”
태수의 시선이 다시 환부로 향했다.
유병태 말이 옳았다.
오른쪽 가슴을 꿰뚫은 나뭇가지 가느다란 줄기가 여러 가닥 흩날리고 있었다. 질긴 풀을 꼬아 밧줄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가닥들의 끝이 일정하지 않은 걸 보니 날카로운 물체에 끊어진 게 아니라 삭아서 끊어진 걸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태수가 확인하는 사이 옆에 있던 김혁권이 한 마디 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더니. 어떻게 사냥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 자기가 친 덫에 당하냐고.”
“따지기보다 수술이 먼저 아니겠습니까.”
“수술 텐트에 있는 어제 그 환자는?”
김혁권이 묻자 태수의 머릿속이 파르륵 굴러갔다.
비단 환자를 옮기는 것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수술 인원 편성까지 한 번에 머리를 굴리고 빠르게 결정 내렸다.
“유병태, 도성민, 이 간호사님. 수술텐트 안에 있는 환자부터 옮겨주세요.”
“네!”
“수술은 정민수, 이기준, 김혁권씨하고 최소현 간호사가 해주시고요.”
“알겠……. 누구랑 누구?”
의료진들이 한 목소리로 대답하다가 동시에 멈칫했다.
정민수와 이기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조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