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468
첫 귀목 쟁탈, 그 이후 (1)
【 실패했군요, 에이비. 】
“죄송합니다.”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몸을 이끌고 돌아온 에이비는 몸을 달랠 시간도 없이 여왕의 앞에 찾아가 무릎을 꿇었다.
찢어진 정장에 살이 잘린 단면이 보인다. 튀어나온 동맥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나왔다.
“…….”
비명없이 고통을 내색하지 않는 에이비의 옆에서, 붕대투성이의 꼬마아이가 중얼거렸다.
[나는 이겼어! 오빠는 아무것도 못했고.]“레라드.”
[왜, 맞잖아.]“너도 잘한 거 하나 없어.”
레라드의 말에, 에이비는 남은 한쪽의 실눈으로 그녀를 원망스레 노려보았다.
이번 전쟁은 레라드의 돌발 행동이 전부 망쳤다고 볼 수 있었다.
만에 하나 레라드가 구슬을 기다리지 않고 수연의 목을 쳤다면, 이미 동백은 ATU에게 넘어왔을 테니까.
[흥.]레라드는 아무런 죄의식도 없는 표정으로 딴청을 피웠다.
에이비는 불쑥 솟아오르는 분노의 감정을 여왕의 앞에서 차마 표출하지 못했다.
잘 싸웠다면 말이라도 안 해.
하다못해 간부 한 명이라도 죽였으면 이런 말을 안한다.
삼재라는 이름을 달고 저렇게 털려서 와버렸으니…. ATU의 미래가 어둡다.
[나 안 털렸어.]에이비의 마음을 꿰뚫어 본 레라드가 발작해 소리쳤다.
[…나 안 털렸다니까!]레라드의 부상 수준은 아무리 높게 쳐줘도 한 전치 6주쯤은 되어 보였다.
온몸에 박혀있는 총알부터, 한쪽 다리는 완전히 박살이 났고, 밤톨처럼 멍든 눈에, 중간부터는 계집싸움이라도 했는지 머리에 자그마한 땜빵이 자리 잡았다.
에이비의 노골적인 시선에 레라드는 슬그머니 정수리를 손으로 가렸다. 아무리 괴물, 싸이코패스라 불리는 녀석도 머리카락의 손실은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럴만 했다.
탈모의 고통과 스트레스는 심장의 염증보다 심각하다.
[보지마! 이이익!!!]수치심이 끝에 도달한 레라드가 에이비를 톡 쳤다.
쾅! 무서운 속도로 바닥에 처박히는 에이비. 죽음이 넘나들며 핏물이 바닥에 고이기 시작했다.
【 레라드. 】
[그치만, 오빠가….]【 가만히 있어요. 지금 당장 회복할 방법을 찾고 있는 도중이니까. 】
차원에서 뻗어나온 여왕의 손이 에이비의 몸을 감쌌다.
그 순간. 그의 몸에서 삐져나온 칠흑같은 형질의 마력이 여왕의 손목을 타고 기어올랐다.
-우웅!
여왕의 왕관이 울렸다.
【 …이건. 】
왕의 표식, 마력을 이런식으로도 운용할 수 있구나.
여왕은 에이비의 기절한 몸을 수거해갔다. 아무리 실망한 녀석이라도, 에이비는 그녀의 자식이나 다름없었다.
【 레라드. 】
[넹]【 …에이비가 낫는 즉시, 왕과 교신하세요. 】
[교신?]【 이야기를 나눠야겠어요. 】
* * * * * * * * * *
다 끝나버렸다.
‘…….’
-우우우웅.
시바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고향에 첫발을 내딛었다.
서울 인천 공항.
내부는 많은 피난민과 여행객들이 군집을 이루어 움직이고, 그런 인파에 휩쓸려 아무렇게나 이동하던 시바는 자연스레 인파의 바깥쪽으로 밀려 나왔다.
“아.”
친구가 납치됐다.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결국 아무도 살릴 수 없었다.
기절해 일어났을 당시를 떠올린 시바가, 양 손을 모아 얼굴을 쓸어올렸다.
괜찮냐며 소리치던 다친 수연 언니와, 사쿠. 그리고 부상을 꽤 입은 밤까지.
직후 느껴지는 무력감과 슬픔은 시바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동백은 시바에게 첫 친구였다.
처음으로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고, 무상의 우정을 나누었던, 진실 된 인연.
시바는 그런 소중한 사람을 지켜주지 못한 것이다.
-우우웅.
자동문이 열리며 시바는 공항에서 빠져나왔다. 터벅터벅대는 힘없는 발소리가 울렸다.
소중했으니까. 그만큼 충격이 심했다.
시바는 손을 펼쳐 자신의 힘없는 손아귀를 바라보았다. 약간의 경련이 그녀의 심신을 표현했다.
“…….”
ATU와의 싸움이후, 그곳에 휘말린 인원을 체크하는 과정에서 진달래에게 시바가 있다는 사실이 전달되었기에, 시바는 앞으로 트리나이츠로서 활동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건 상관 없었다.
지금은 단지, 그냥… 조금 편해지고 싶다.
-터벅.
시바는 꾸준히 앞으로 걸었다. 눈앞에 자신을 마중 나온 어머니가 있었다.
“엄마.”
우리 엄마다.
시바가 중얼거렸다.
뚜껑이 닫힌 텀블러를 쥐고 있던 진달래가 모성애 넘치는 얼굴로 시바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리 와.”
엄마가 부른다. 힘없이 걷던 시바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더니, 진달래를 힘껏 끌어안았다.
“…엄마.”
떨리면서도, 구슬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달래는 구태여 그녀를 다그치지 않았다.
“왜 그랬어.”
시바에겐 상처가 많아 보였기도 했고, 달래 역시 심신으로 많이 지친 상태였다.
시바는 한참동안 말이 없다가,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요…. 엄마.”
짧은 상봉을 나눈 둘은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여행객들을 위한 좌석에 앉아, 마주본 모녀.
“마셔.”
달래는 텀블러를 시바에게 내밀었다. 3개월 전부터 시바가 자주 마시던 따뜻한 레몬티였다.
뚜껑을 열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시바는 혹시 엄마가 나를 다그치지 않을까 걱정하며 조심스레 차를 한 잔 머금었다.
시큼하면서도 단맛이 확 나는…. 진달래가 직접 만든 티.
축 처진 몸이 따뜻하게 녹아내리며, 시바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툭.
진달래의 옆머리가 시바의 어깨에 닿았다. 흘러내린 달래의 분홍머리가 시바의 콧잔등을 괴롭게 간질였다.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했어?”
시바는 참지 못했다.
“…삐. 엄마, 나….”
짤막한 울음소리와 함께, 시바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안하다는 말보단 억울함이 복받치고, 또 서러웠다.
“나도, 잘하고 싶었는데…. 삐이…흑.”
말도 잇지 못했다. 고개 숙인 시바는 어린 시절처럼 목놓아 울었다.
주변 사람들이 가끔씩 쳐다보기는 했지만, 아무 상관 없었다.
“삐에에엥….”
아이 같은 울음. 시바의 목에 팔을 걸어 잡아당긴 진달래가 시바의 얼굴을 가슴에 품었다.
흘러넘친 뜨거운 레몬티가 진달래의 허벅지에 흘러내렸다.
빨갛게 피부가 달아오를 정도로 뜨거웠지만, 진달래는 조금도 아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흑, 엄마아….”
진달래의 흰 원피스에 눈물 자국이 서린다. 시바의 헝클어진 머릿결을 정리해주던 진달래는 따뜻한 목소리로 제 딸을 달랬다.
“우리 딸, 아직 애기네.”
“흑, 흐윽….”
“나중에 다 말해줄 거지?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시바는 눈물을 닦으며 자신의 엄마를 바라보았다.
눈밑에 걸친 희미한 다크서클과 고치지 못한 화장이 보였다. 얼마나 기다린 걸까.
시바는 왜인지 그게 더 슬프게 느껴졌다.
“우리 딸.”
“…응.”
“엄마가 사랑하는 거 알지?”
“응.”
진달래, 엄마에게 남은 것.
그건 아마 자기밖에 없을 거라고 시바는 생각했다.
매번 진달래가 그렇게 말하기도 했고, 시바도 알 정도로 과분한 사랑을 받았으니까.
시바도 그런 진달래 앞에서는 착한 딸로 있고 싶었었다.
헌데 왜, 그 남자가 뭐라고.
그 알량한 호기심이 일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 선택에 대해서는 후회하진 않았다. 시바는 친구를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그 친구를 잃게 된 것이 조금은 후회스러웠다.
만약 내가 더 강했더라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스윽.
시바의 눈가를 진달래가 엄지로 훑었다.
상냥한 손길에 울다가도 웃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는, 따스한 어머니의 손길.
…….
그런 시바의 눈앞이. 잠시 어두컴컴해졌다.
한순간, 진달래의 손이 거칠거칠한 남성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눈앞이 점멸했다. 시바가 앉아있던 공간이 며칠 전에 자신이 기절한 방으로 바뀌었다.
“우리 딸?”
“…삐.”
왜,
방금 나는 그 남자를 떠올린 걸까.
진달래의 모습과 왕의 모습이 한 순간에 겹쳐지면서, 시바는 소름이 끼쳐 몸을 떨었다.
자신의 친구를 앗아간 증오스러운 왕.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까.
엄마의 품에 안긴 시바의 눈꺼풀이 서서히 닫혔다.
* * * * * * * * * * *
“야. 이시바.”
날카롭고, 사나운 여자의 말이 시바의 귀에 꽂혔다.
한국 헌터협회의 최고 권력자. 별이 팔짱을 낀 채 잔뜩 화가난 얼굴로 시바에게 설교했다.
“누구 마음대로, 말도 없이 트리 나이츠에 입단하라고 했어?”
“…….”
피로에 찌든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시바. 그런 딸의 얼굴을 품은 진달래가 별을 노려보았다.
“…지금 우리 딸 피곤한데, 나중에 말하면 안 돼요 한별 언니?”
“아니 달래야.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돼?”
평소에 그렇게나 명량하고 귀엽던 별이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시바는 옆을 보았다. 소파에 앉은 이세영이 턱을 괸 채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으, 으으! 또 나만 나쁜 애야? 달래야, 어화둥둥 내새끼가 꼭 답은 아니라니까? 야 이세영.”
“왜.”
건들거리며 답하는 세영에게 별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너 잘 알잖아. 아니 달래 너도 알잖아. 요즘 세상 망가져 가는 거.”
평소였다면,
-꺅~ 시바야아앙♡
그런 반응을 보였을 별이다.
분명 가장 화를 많이 내는 건 이세영이라고 생각했는데.
시바는 기가 죽어선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지금 왕이랑…. 왕을 만나고 왔다고 하잖아. 귀목이 있는 곳에!”
심각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사안.
평소 왕에 대한 대책을 무수히 짜고 있던 별인 만큼 눈이 뒤집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 너 왕이 누구고 뭘 하는 놈인진 알고 간 거야?”
“…….”
“그러다가 엄한 일이라도 당하면, 몸에 문제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엄마 마음은 생각해봤어?”
“별 언니, 전 괜찮아요.”
시바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엄마까지 다그칠 기세다.
별은 씩씩대며 분을 삭였고, 세영은 입을 닫은 채 시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맨날 쓴소리 하는 건 나지? 어?”
“이미 끝난 일이야.”
별의 말에 세영이 답했다. 세영의 카리스마 있는 눈이 시바를 향하자, 시바는 입을 꾹 다물고 무릎에 손을 얹었다.
“일단은 쉬게 둬. 보니까… 많이 지친 것 같은데.”
“…….”
그건 사실이었다.
무턱대고 화를낸다고, 그것이 시바에게 전해지리란 보장은 없다.
별은 입을 닫았고. 진달래가 시바의 손을 꼭 쥐었다.
아직 이유를 말하지는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시바가 꽤 슬퍼 보였다.
세영은 걱정스런 얼굴로 시바를 바라보다,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이모, 둘째 엄마. 죄송해요.”
“아냐 들어가 봐. 달래랑 같이.”
진달래와 함께 시바가 방을 나가자마자, 별이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한참을 혼자 씩씩대다가. 끝내.
“히잉….”
즙 짜는 별이. 세영이 한숨을 쉬었다.
“넌 매번 화만 내더라. 방식 좀 바꾸지 그래?”
“…애가 시헌이 딸 아니랄까봐 맨날 위험한 짓만 골라 하는데 어떻게 그래… 흑.”
“나중에 이모 싫다고 하는 거 아니야?”
헉, 숨을 삼킨 별이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아앙….”
어쩌면 시바보다 더, 애같이 우는 별이.
소파에 앉아있는 세영에게 기어가 무릎을 부여잡고 오열했다.
“흑, 흐엉… 난, 끅, 그냥, 끄윽, 걱정한 건데에….”
억울한 초등학생이 억지로 울음을 참는듯한 말투.
“야 왜 진짜로 울어.”
기겁한 세영이 별을 꼭 안아주었다. 검은 코트에 폭 안긴 별이 가슴에 코를 비비며 오열했다.
“니들이 나 자꾸 나쁜 년 만들자나!! 씌이잉….”
“아 미안해.”
“이씨… 이거 가스라팅이야!”
“별아, 가스라팅이 아니라 가스라이팅.”
“씌잉….”
더 서럽게 우는 별이. 세영은 피식 웃으며 별을 달랬다.
마음은 잘 알고 있다.
소중하니까. 총대매고 소리를 쳤겠지.
소중하니까, 이렇게 우는 거다.
진달래가 요즘 사회에 보기 힘든 참어머니라지만, 세영과 별이도 만만치 않을 정도의 모성애를 시바에 의해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빨리 평화롭게 만들어야지.”
“크응… 웅. 맞아.”
보들보들한 가슴에 코를 비벼대던 별이, 세영의 등을 꼭 끌어안고 흥!!
코 푸는 소리에 움찔, 세영이 별의 어깨를 잡고 떨어뜨렸다.
파인 옷을 입고 있던 터라 맨가슴으로 이루어진 골에 투명한 콧물이 길게 이어졌다.
“야 너 진짜….”
눈이 탱탱 부은 별이 코를 먹으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오늘 저녁에 엄마 성묘가기로 했는데. 이 꼴로 어떻게 가냐. 흑. 응?”
“그런 말을 지금 왜해.”
“엄마도 이해해주겠지?”
우리 딸 아직도 아가라면서 좋아해주지 않을까.
얼굴만은 여전히 귀여우니, 그럴 게 분명하다.
찐따같이 우는 별을 껴안은 세영이, 한숨을 쉬며 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별이 넌 어째… 갈수록 정신 연령이 어려지는 것 같냐?”
“흥.”
“나이도 먹었는데. 주책맞게.”
“여자는 와인이랬거든?”
“그거 나이먹은 사람 특이야.”
“헉.”
세영은 피식, 예쁜 미소를 지었다.
“…탑 공략 준비는. 다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