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77
제177화. 정체
뭐든 처음이 어색하지, 반복되면 익숙해지는 것이 생물의 습성.
“크흘흘흘!”
멀쩡했던 감정을 절로 분노케 하는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린 순간, 난 이곳이 꿈속임을 직감했다.
아마 이다음엔 울음소리가 들릴 것이다.
“흐흐윽….”
역시나.
네로 자식을 죽인 이후부터, 종종 꿔왔던 그 요상한 꿈이다.
처음 꿨을 땐, 주변 풍경은 하나도 안 보이고 오직 소리만 들렸었다.
허나 똑같은 꿈이 반복되고 내 정신도 익숙해지다 보니, 안개에 가려졌던 주변이 차츰 보이기 시작했다.
잔잔한 바람이 부는 평원 끝 낮은 절벽 아래, 풀과 돌에 가려진 익숙한 비석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낯선 사람들.
하나같이 비석을 보면서 울고들 있다.
뒷모습만 보여서 정확히 누구인진 알 수 없지만,
내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뒷모습들이다.
특히 저기,
흰 셔츠에 검은 포니테일 머리를 한 여인은 그냥 자세만 봐도 누군지 알 것 같다.
남들처럼 똑같이 처량하게 우는 그녀에게 다가가고자 한 걸음을 내디딘 순간,
[벨져 님!]익숙한 목소리에 눈이 떠졌다.
시연의 뒤를 봐주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수호가 돌아왔다.
시간은 밤의 장막이 이제 막 걷히기 시작한 새벽.
의자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든 모양이다.
옆에는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댄 채 잠든 메이가 있었다.
그녀가 깨지 않도록 수호에게 감응으로 얘기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연 님은 도적단 무리와 합류해서 그들의 거처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 도적들. 아무래도, 과거 용사의 검술을 계승 받은 자들인 것 같습니다. 용사 차시혁의 명예를 되찾고자 레지에타에 돌아왔다고 했습니다.]이미 예상을 했기에 크게 놀랍진 않았다.
아니, 놀랐다고 해야 할까?
굳이 돌아올 필요가 있나?
이제 와 내 명예를 찾는다고 해서, 본인들에게 이득 될 일은 없을 텐데?
수호는 심각한 표정으로 감응을 이어갔다.
“이상한 냄새?”
[아무래도 이 도시에 저희 말고도 또 다른 마족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그 말을 듣자마자, 자고 있던 메이를 조심스레 다른 쪽으로 눕혔다.
그러곤 좌우 눈치를 살핀 뒤, 수호에게 다시 물었다.
“진짜야?”
[예. 그것도 벨져 님에게 매우 익숙한 마족. 아니 반마들입니다.]그 말을 듣자마자, 입에서 헛웃음인지 욕설인지 모를 바람 소리가 피식 새어 나왔다.
* * *
무지의 안갯속.
아무것도 없고 보이지 않는 무의 공간을 홀로 걷는 자신.
이미 몇십 번은 봐왔던 익숙한 풍경.
“또, 그 꿈인가?”
시연은 이곳이 꿈속 세계임을 바로 깨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저 앞으로 익숙한 누군가가 보였다.
머리 위로 자라난 두 개의 뿔, 피로 물들인 듯한 붉은 눈빛.
정체 모를 남자는 오늘도 시연을 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속삭였다.
“ㅁ… 안.”
하지만 오늘은 그 말이 선명하게 들리는 듯했다.
시연은 한 걸음 더 다가가 남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미… 안….”
흐릿하긴 해도 분명하게 들은 말.
정체 모를 남자는 시연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뜬금없었다.
미안하다니.
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것일까?
좀 더 자세히 묻고자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
“시연 님!”
누군가의 부름에 시연은 잠에서 깼다.
루백의 아들 루쉔이었다.
오죽 급한 상황이었으면, 여자 혼자 머무는 방에 노크도 없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갑자기 들어와서 죄송합니다만, 당장 움직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 무슨 일이죠?”
“근위 기사단이 지금 저희의 거처를 포위했습니다!”
시연은 곧장 거처 밖으로 뛰쳐나갔다.
시간은 아직 장막이 다 걷히지 않은 새벽 대.
하지만 거처 주변엔 마력으로 발현된 수십 개의 불빛이 가득했다.
그 안에선 수십 명의 무인들이 검을 뽑은 채로 불빛의 주인들과 대치 중이었다.
시연과 루쉔은 곧장 루백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루백 님!”
루백 기사단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레이든 왕자와 대면하고 있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길에 뒤를 밟힌 모양이군요.”
시연은 오는 동안 줄곧 느꼈던 미지의 시선을 떠올렸다.
자신 때문에 이 사태가 벌어졌단 생각이 들면서 미안함과 분노가 샘솟았다.
“차시연.”
그때, 기사단을 이끌고 온 레이든 왕자가 앞으로 나섰다.
“레지에타 대륙에 마지막으로 남은 용사의 후손이여. 여기 있는 자들을 지키고 싶다면, 얌전히 우릴 따라와라.”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레이든 왕자?”
루백이 기를 쓰며 소리쳤지만, 레이든은 대꾸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전적으로 너 하나다. 너만 오면 우린 도적단에게 손을 대지 않고, 조용히 물러날 것이다.”
시연은 검을 뽑으며 물었다.
“내게서, 뭘 원하는 겁니까?”
“별거 없다. 그냥 이야기만 들으면 된다.”
“이야기?”
“추악한 죄인의 후손을 데리고 뭘 할 생각은 없다. 들을 것만 듣고 나면, 바로 보내줄 터이니. 더 캐묻지 말고 그냥 따라와라.”
“따르실 필요 없습니다 시연 님!”
루백이 레이든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제껏 시연 님에겐 관심조차 주지 않다가, 이제 와서 찾는 데엔 필시 이유가 있겠지요. 분명 좋은 일은 아닐 겁니다!”
“좋건, 말건, 그쪽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루백 공. 지금 루백 공이 신경 써야 하는 건, 당신을 따르는 무인들이 아닐까요?”
“그 또한 레이든 왕자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닌…!”
일련의 불안한 기운을 느낀 루백이 급하게 주위를 돌아봤다.
그저 어둠을 밝히는 줄로만 알았던 붉은빛.
허나 그것은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우린 전면전 따위를 하러 온 것도 아닙니다. 이대로 계속 차시연 양도를 거부한다면, 차시연을 제외한 여기 모두를 거처와 함께 다 태워버릴 겁니다.”
“뭣이?”
“허구한 날 검만 휘두른 그대들에게, 마법을 막을 방도 따윈 없겠죠.”
레이든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주변을 밝힌 붉은빛에서 더욱 강렬한 마력이 발산되었다.
검을 쥔 채, 이를 가는 루백을 지나치며, 레이든의 눈은 다시 차시연에게 향했다.
“더는 말하지 않겠다 차시연. 5초 내로 선택해라.”
“따르겠습니다.”
시연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시연 님 안 됩니다!”
루백과 무인들이 만류했지만, 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레이든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시연이 선택할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모두를 지키는 것.
상황이 어떻든, 과정이 어떻든, 그것은 용사의 피를 이어받은 시연이 해야 할 일이었다.
시연은 그렇게 레이든을 따라나섰다.
* * *
레이든을 따라 사할리스로 돌아오기까지,
시연은 기사단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는 일절 받지 않았다.
포박은커녕 시연의 검도 뺏지 않았고, 레이든의 뒤에서 기사단과 발을 맞추며 정말 평화롭게 입성했다.
레이든은 이내 기사들을 전부 물리고선 시연을 자신의 방으로 들였다.
그러곤 보란 듯이 시연의 앞에서 무장을 해제했다.
그 모습에 시연은 더욱 경계심을 드높였다.
“나는 대화를 할 땐 검을 잡지 않는다. 너도 그만 건방 떨고 무장을 풀어라.”
시연은 잠시 머뭇거렸다.
“네가 죄인의 후손이건 말건, 어쨌든 내 백성이다. 지금 너의 행위는 명백히 왕명을 거부하는 것이니, 그만 주접떨고 무장 풀어라.”
반박할 여지 없는 사실.
그의 말마따나, 용사의 후손이기 전에 시연은 부르크 왕국에 속한 백성 중 한 명이었다.
시연은 허리춤에 찬 검과 손목에 찬 건틀릿을 차례대로 풀어 문 옆에 내려놓았다.
비로소 완성된 평화적인 대화 자리.
허나 이야기는 바로 시작되지 않았다.
한참을 말없이 앉아만 있는 그를 보며, 보다 못한 시연이 물었다.
“제가 들을 이야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한데, 어찌 가만히만 계시는 겁니까?”
“그 이야기를 내가 한다곤 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레이든 그런 시연의 뒤로 시선을 옮겼다.
“때마침 왔구나.”
순간 기척을 느낀 시연이 벌떡 일어나 몸을 돌렸다.
벌컥 열린 왕자의 방문 너머엔 미소가 만연한 얼굴로 허리를 숙이고 있는 코흐가 자리했다.
코흐는 안경을 고쳐 올리며, 시연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용사의 후손이시여. 코흐라고 합니다.”
얼떨떨한 상황에 시연은 화답하지 못했다.
코흐는 자연스레 둘이 앉은 탁상으로 다가왔고, 레이든에게도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자리를 만들어주신 것에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레이든 왕자님.”
“입에 발린 감사 치레는 필요 없다. 하려던 이야기나 빨리해라.”
“그러죠.”
코흐는 미소를 유지하며 둘 사이에 있던 세 번째 의자에 착석했다.
“최근에 벨져라는 남자와 접촉한 적이 있으시죠?”
시연의 낯빛이 바로 돌변했다.
“그의 정체를 혹시 알고 계십니까?”
“모릅니다.”
“반대로 시연 님의 정체를, 그자는 알고 있습니까?”
“용사의 후손을 말하는 거라면, 알고 있습니다…….”
사실상 처음부터 알고 접근했던 거라 봐도 무방했다.
“도적단 토벌 의뢰까지 함께 수행하러 오신 걸 보면, 썩 나쁘게 지내시진 않은 것 같은데. 저희로선 참 이해하기 어렵군요.”
“말 돌리지 마시고 그냥 말하세요!”
이쯤 오니 시연은 이 코흐라는 남자가 자신에게 뭘 이야기하러 왔는지 감이 왔다.
“저한테 벨져 씨의 정체를 알려주러 오신 거 아닙니까?”
코흐는 히죽 웃으며 안경을 올렸다.
“그 남자는 용사의 후손인 당신과 아주 재밌는 연이 있는 자입니다.”
“연?”
“안 믿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닌…….”
-콰콰왕!!
코흐가 뒷말을 이으려는 차,
갑자기 창문이 있던 좌측 벽이 큰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동시에 불어닥친 먼지바람이 셋의 시야를 가렸다.
“이게 무슨…?”
“말이 무섭게 찾아왔군요.”
코흐는 삐뚤어진 안경을 고쳐 올리며 무너진 벽을 주시했다.
시연과 레이든도 황급히 검을 집으며 경계 태세를 갖췄다.
잠시 후, 흩어진 먼지 속에서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벨져 씨?”
여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당사자, 벨져였다.
벨져는 시연과 레이든을 한 번씩 보다가도, 눈을 화악 내리깔며 코흐를 쳐다봤다.
익숙한 살기에 코흐는 삐질 땀을 흘렸지만, 미소는 유지했다.
“이런 곳에서 보니, 감회가 새롭군요.”
벨져는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니들 스토커냐? 왜 징그럽게 따라다녀?”
“그래야지 당신이 뭘 하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
이미 아는 사이인 듯 말을 주고받는 둘을 보며 시연은 혼란에 뒤덮였다.
머지않아 소란을 듣고 달려온 근위 기사단이 벨져의 주위를 에워쌌다.
“설마하니 제 발로 나타날 줄은 몰랐군. 벨져라는 이름의 남자여. 지금의 무례는 내 묻지 않을 테니, 얌전히 포박에 응해라. 너를 만나고자 하는 분들이 계신다.”
벨져는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심기가 불편해진 레이든의 미간이 골짜기처럼 좁혀졌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자꾸만 말을 두 번씩 하게 하는구나. 내 치밀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다시 명하겠다. 얌전히 나를 따라라.”
이번에도 대답은커녕 벨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더 이상 봐줄 이유가 없어진 레이든은 기사들에게 손가락으로 공격 지시를 내렸다.
이에 코흐가 입을 열었다.
“괜한 짓 안 하시는 걸 권해 드립니다.”
레이든의 불쾌한 시선이 코흐에게 향했다.
“왕자님의 기사들로는 저 남자를 사로잡을 수 없습니다.”
레이든은 코웃음을 쳤다.
저들은 왕국에서 제일 혹독한 훈련과 교육을 받은 정예 기사들로 구성된 근위 기사단이다.
소수의 병력으로 한 부대를 상대할 수 있는 기사들이 고작 인간 한 명을 상대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레이든의 이런 생각을 눈빛으로 읽은 코흐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기사들은 질주를 멈추지 않았고, 그렇게 수십 개의 칼날이 한꺼번에 벨져의 몸을 덮쳤지만,
-카카강!
그중 어느 것도 벨져에겐 닫지 못했다.
벨져가 단 한 번의 검격으로 근위 기사들의 검을 전부 쳐낸 것이다.
그 파동이 워낙 강렬했던 탓에, 벨져의 머리를 감싸고 있던 후드가 벗겨졌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주변.
본래 첫 일격이 막히면, 곧바로 다음 연격을 가해야 하는 것이 이치.
허나 기사들은 그 누구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멍해진 눈으로 후드가 벗겨진 벨져의 머리만 볼 뿐.
이는 레이든과 시연도 마찬가지였다.
“……뿔?”
인간으로선 절대 가질 수 없는 신체 부위.
그것이 머리 양쪽에 버젓이 자라난 존재.
충격에 휩싸인 침묵 속에서 시연의 입이 가장 먼저 열렸다.
“마족?!”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