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truck a jackpot after a marriage RAW novel - Chapter 79
079 첫날밤
“···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
김구름이 나에게만 들릴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같이 다니자고 말했을 때부터 틈만 나면 내 뒤로 와서 저러고 있다.
죽으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왠지 모르게 내 몸에 활력이 샘솟는 느낌이라 내버려 뒀다.
“저기가 해리포터 테마인가?”
“버터 맥주 마셔보고 싶어요!”
“오, 저도 그 맛이 궁금했습니다.”
“···죽어죽어죽어죽어.”
처음의 어색했던 분위기와는 다르게 우리는 제법 재밌게 놀러 다녔다. 이나 같은 테마도 즐기고.
각종 애니메이션에서 나오는 음식들도 먹어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늘 씨, 이거 드셔보세요.”
“저기! 닌텐도 월드도 가봐요!”
“저희도 커플 머리띠 하면 안 돼요?”
그중에서도 강바다는 물 만난 고기처럼 높은 텐션을 유지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좀 더 자주 데이트를 다닐걸.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인가.’
앞으로는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둘만의 데이트를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바다의 미소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
“저기 봐요. 다들 머리에 하나씩 쓰고 다니는데. 완전 귀엽지 않아요? 응? 응?”
“으음···.”
물론 지금처럼 그 텐션이 조금 과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모처럼 찾아온 관광지니까 어울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래요.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와아아-!”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캐릭터 머리띠까지 착용하게 됐으나, 이것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다.
언젠가 예나의 동화책에 등장했던 캐릭터를 따라서 나는 강아지, 강바다는 토끼 귀가 달린 머리띠를 착용했다.
“귀여워요-!!”
“크흠···. 그래요?”
“응응! 완전! 같이 사진 찍어요!”
솔직히 엄청나게 부끄럽지만 강바다가 저렇게 좋아하니까. 토끼 귀를 쓴 그녀의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기도 하고.
그렇게 커플 사진을 찍으면서 추억을 채워나갔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그동안 우리가 평범한 커플과는 정말 거리가 멀었구나 싶었다.
“후후후···.”
찰칵- 찰칵-!
옆에서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내 사진을 찍어대는 김구름만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녀석은 내가 머리띠를 쓰는 순간부터 ‘건수를 잡았다’라는 느낌으로 내 주변을 맴돌며 사진을 찍었다. 일부러 소리까지 내면서.
“뭐하냐?”
“우리 오빠가 너어어무 귀여워서. 흐흐흐.”
“······.”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원혼 코스프레가 안 먹히니까 이제 노선을 변경한 모양. 전과는 다르게 아주 치명적인 데미지가 들어온다.
내 혈육답게 내가 가장 싫어하는 행위가 뭔지 금세 파악하는 김구름이었다.
“그쵸? 우리 하늘 씨 귀엽죠?”
“저것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하늘 씨, 이것도 한번 써봐요!”
텐션이 너무 높아서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진 강바다를 살살 꼬드겨서, 나에게 이것저것 시켜보는 김구름.
내 살벌한 눈빛 정도는 가벼운 웃음으로 넘겨버리는 여유까지. 과연 우리 엄마 딸이구나. 정말 만만치 않은 상대야.
– 너도 뭐 좀 해봐!
– 제, 제가요?
슬쩍 박도진에게 눈빛을 보냈으나 녀석은 눈치를 보며 식은땀만 뻘뻘 흘렸다.
그래, 괜히 부담 주지 말자.
김구름의 지랄 맞은 성격을 받아주는 것만 해도 성인군자나 다름없다. 이 기회가 아니면 분명 결혼도 못 하겠지.
‘···그렇다고 저걸 내버려 둘 수도 없고.’
어떻게 김구름을 골탕먹어야 할까 고민하던 그때. 문득 강바다가 어디론가 뛰어갔다.
금세 다시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웬 머리띠가 하나 들려있었는데. 화려한 왕관에 노란색 레이스가 달린 공주님 장식이었다.
“구름 씨도 이거 써봐요.”
“저는 괜찮···.”
쏘옥-
김구름의 변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머리 위로 씌워지는 왕관. 의 피치 공주가 생각나는 비주얼이었다.
“어때요? 잘 어울리죠!?”
짝짝짝짝-!
레이스를 정돈해준 강바다가 우리를 향해 김구름을 내밀었다. 나는 매우 흡족해하며 기립박수를 쳤고, 박도진도 눈치를 보다가 나를 따라했다.
스윽-
직후 김구름의 눈총을 받은 박도진이 돌처럼 굳어버렸으나. 진즉 브레이크가 고장 나버린 강바다와 풀엑셀을 밟는 나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야, 잘 어울린다! 당장 구매해!”
“응응! 너무 예뻐요!”
“자, 잠깐···!”
당황하는 김구름이 말릴 새도 없이 나는 택부터 때버렸다. 이제 꼼짝없이 구매해야 하는 상황.
게다가 나와는 다르게 강바다는 공주님 왕관을 쓴 김구름을 진심으로 귀여워했다.
좀처럼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는 혈육이지만, 강바다의 순수한 애정만큼은 녀석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박도진, 너도 써.”
“나까지 그럴 필요는···.”
“오빠만 안 쓰면 이상하잖아.”
결국 체념한 김구름의 분노는 박도진에게로 향했고, 졸지에 우리 네 사람 모두 캐릭터 머리띠를 쓰고 다녔다.
근데 이게 처음에만 좀 어색했지, 나중에는 다들 즐기는 수준에 이르렀다.
나중에는 거대한 별 모양 파우치라든가, 캐릭터 안경이나 시계 등이 잔뜩 추가됐다.
“찍습니다. 하나, 둘!”
찰칵-!
우리는 포토존을 마주칠 때마다 각종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고, 그렇게 수백 장을 찍고 나니 어느덧 해가 기울었다.
“재밌었네.”
“응. 저도요.”
“나쁘지 않았어.”
“···저도 즐거웠습니다.”
그렇게 스튜디오의 구석구석까지 알차게 즐긴 우리는 저마다 한 마디씩을 내뱉으며 입구를 나섰다.
각종 캐릭터 소품을 온몸에 떡칠한 채 당당히 걸어나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일순 경건함이 느껴질 정도로 ‘관광객’ 그 자체였다.
“슬슬 배가 고픈데.”
“형님. 제가 생각해둔 맛집이 있습니다.”
“그래?”
“네, 모두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반나절 동안 우리랑 친해지면서 부쩍 자신감이 오른 박도진. 그는 더 이상 눈치 볼 것 없이 자신의 의견을 마음껏 피력했다.
솔직히 좀 의외였다. 처음에는 김구름이 관계의 주도권을 아주 꽉 잡은 것처럼 보였으니까.
‘보기 좋네.’
확실히 기죽어 있는 모습보다는 자신감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은근히 박도진의 리드를 바라는 듯한 김구름의 모습도 신선했고.
“좋아, 그럼 우리 매제 입맛 좀 볼까?”
“매, 매제라니!? 우리 아직 결혼 안 했어!”
“아서라. 도진이 아니면 누가 네 성격을 감당하겠냐? 이 기회 놓치면 너는 평생 독신이야.”
“정중히 모시겠습니다. 형님!”
따질 타이밍을 놓친 김구름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고. 박도진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바다가 조용히 웃음을 삼키며 내게 팔짱을 껴왔다.
“보기 좋네요.”
“그러게요.”
“우리도 저런 모습일까요?”
“음···.”
불현듯 파고드는 질문에 나는 침음을 삼켰다. 얼핏 가볍게 던진 말 같지만, 왠지 그 안에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강바다의 가족이 우리를 보는 시선은 어떨까. 지금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면 좋을 텐데.
‘작은 형님이나 누님은 비슷하지 않을까?’
처음에는 까칠했던 강태양과 강별이었으나, 최근에는 대놓고 우리 두 사람을 밀어주는 듯한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
적이었을 때는 그렇게 무서웠는데, 지금은 그만큼 든든한 사람들도 없지.
‘다른 사람들도 인정하게 만들어야지.’
언젠가 강바다와도 이야기했던 부분이지만, 되도록 우리는 모두의 축복 아래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산을 비롯해서 아직 넘어야 할 산이 한 가득이지만. 예전처럼 마냥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 내 옆에서 느껴지는 이 온기. 강바다와 함께라면 분명 해낼 수 있을 거다.
“하늘 씨?”
좀처럼 대답이 없자 강바다가 의문 섞인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말 없이 그녀와 눈빛을 마주쳤다.
연한 갈색으로 반짝이는 강바다의 동공. 어찌나 맑은지 호수를 마주한 것처럼 나를 비롯한 주변의 풍경이 비쳐 보인다.
그녀를 만나기 전의 내 세상은 온통 회색빛이었으나, 그녀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세상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나는 언제까지고.
이 세상을 지켜내고 싶었다.
“그렇게 만들 거예요.”
“네?”
“우리도 저런 모습일까 물어보셨잖아요? 사실 저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바라보든 상관없지만, 바다 씨가 원하신다면 제가 꼭 그렇게 만들 거예요.”
“······.”
말없이 눈을 마주쳐 오는 강바다. 나 역시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자 문득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응. 믿어요.”
쪽-
그 말과 함께 강바다는 내 얼굴을 붙잡으며 입술을 부딪쳐왔다. 가벼운 입맞춤이었으나 거기서 일어난 파문은 결코 적지 않았다.
본능에 따라 그녀의 턱을 마주 잡고 조금 더 길게 사랑을 나누려던 그때.
“큼큼···.”
어디선가 들려온 헛기침에 우리는 화들짝 놀라며 떨어졌다. 돌아보자 시선을 피하고 있는 박도진과 음흉한 미소를 입가에 띤 김구름이 보였다.
“왜? 하던 거 계속하지?”
“······.”
김구름의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있었다. 가볍게 흔들어 보이는 저 제스쳐는 분명 우리들의 애정행각을 제대로 포착했다는 뜻이겠지.
“아까는 유교 드래곤 강림해서 그렇게 혼을 내시더니, 정작 본인은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낯부끄럽지도 않으신가?”
“···어디부터 봤냐?”
“대충 ‘바다 씨가 원하신다면 제가 꼭 그렇게 만들 거예요’부터? 키야아-! 나는 무슨 드라마 주인공인 줄 알았네. 어우 팔에 닭살 돋은 거 봐.”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건 강바다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내 뒤로 몸을 숨겼다. 이후로도 김구름의 놀림은 한참이나 계속됐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분위기가 얼추 정리되자 박도진이 입을 열었다.
“···이제 식사하러 가실까요?”
“···그러자.”
우리는 깔깔거리는 김구름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 * *
이후 김하늘 일행은 박도진이 추천한 식당에서 복어 요리를 먹었다. 좀처럼 접하기 힘든 음식이라 무척 즐거운 식사였다.
모두는 자연스럽게 술을 한 잔씩 걸쳤고, 잔뜩 달아오른 분위기에서 점차 하루가 끝나갔다.
“슬슬 마무리할까?”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김하늘의 제안에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은 식당에서 나와 숙소로 향했다. 같은 여행권이었던 탓인지 숙소도 바로 옆방이었다.
“덕분에 오늘 즐거웠습니다.”
“그래, 우리도 즐거웠다.”
“그럼 저희는 먼저···.”
“잠깐.”
문득 김하늘이 모두를 멈춰 세웠다. 김구름이 설마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맺혔다.
“어디 가려고?”
“그야 각자 방으로···.”
“어허! 남녀가 유별한데 어찌 같은 방을 쓰려고 하는 것이야.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방을 재배치해야지.”
“야, 그게 무슨 개소리야!”
김구름이 대노하며 목소리를 높였으나, 김하늘의 표정은 전에 없이 단호했다.
여동생이 바로 옆 방에서 남자친구와 한 침대를 쓰겠다는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오빠가 세상에 얼마나 있겠는가.
‘게다가 여기는 방음도 안 돼.’
그들이 묵는 호텔은 오사카에서도 유서 깊은 전통 목조 건물. 고풍스럽긴 하다만 방음과는 여러모로 거리가 멀었다.
여동생이 외간 남자와 함께 잔다는 상상만으로도 꺼림칙한데, 그렇고 그런 소리까지 직접 듣게 된다면 100% 트라우마가 생기겠지.
‘무조건이야.’
술을 잔뜩 마신 20대 남녀 커플이 한 방에 있는데,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절대 배알 꼴려서가 아니다.
이건 가족으로서 당연한 거다.
“언니! 언니가 좀 말려보세요. 더블데이트는 그렇다 쳐도, 이건 아니잖아요!”
“으음···.”
김하늘의 단호한 표정을 보며 곧바로 노선을 트는 김구름. 허나 예상과는 다르게 강바다는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어.’
강바다는 아까부터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녀도 김하늘과 단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으나.
‘참을 자신이 없는걸요!?’
평소랑은 다르다. 뭔가 여행지에서만 느껴지는 분위기도 그렇고, 아까 김하늘의 멋진(?) 고백에 잔뜩 몸이 달아오른 상태.
거기에 술기운까지 더해지니, 솔직한 말로 자신이 없었다. 김하늘을 덮치지 않을 자신이.
‘그, 그건 절대 안 돼!’
혹시 몰라서 이것저것 준비해놓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먼저 기다려달라 해놓고 이제 와서 꼬시는 건 너무 모양이 안 산다.
게다가 바로 옆 방에 손아래 시누이가 있는데 그런 짓을 했다가는 얼굴도 못 들겠지. 그것이 강바다에게 남은 마지막 이성이었다.
“제가 구름 씨랑 잘게요.”
“언니!?”
믿고 있던 마지막 희망이 무너지자 김구름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반면 박도진은 예상했다는 듯 겸허히 고개를 끄덕였고.
“짐부터 옮기자.”
“···예.”
박도진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짐을 옮겼다. 그렇게 남남여여 커플의 첫날밤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