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Gaiden 66
65. The First
* * *
엘 시드.
스페인의 전설적인 영웅 이름을 본떠 지었다는 그 마스터는 픽 미 업 최초의 베타테스터였다.
또한, 그는 최초의 랭커이자, 최초의 7성 보유자였으며
최초의 80층 돌파자였다.
그리고,
현 랭킹 1위였다.
그 녀석은 커뮤니티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일개 라이트 유저에 불과했던 나를 픽 미 업에 빠져들게 만든 존재였다. 초창기의 나는 픽 미 업을 단순한 현질 게임으로만 취급했을 뿐이었지만, 그 녀석을 만난 이후부터 인식이 크게 바뀌었었다.
유르넷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랭킹 3위도 우수하기는 하지만 무련에 비하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그 다음 서열도 마찬가지. 무련이 임무 공략을 하지 않는 만큼, 무너질 이유라고는 결국 하나밖에 없었다.
“놈을 알고 있는 것이냐?”
위령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았다.
이해가 잘 안 가는 눈치였다.
그렇겠지.
랭킹 1위가 잠적해버린 것은 현실 시간으로 1년 전.
뫼비우스의 시간으로는 3년이 훌쩍 넘는다. 타오니어의 서브 마스터에 불과한 나와는 활동 시간대가 전혀 맞지 않으니, 이런 내 반응이 의심스러울 것이다.
“이름은 들어봤지.”
“어쨌든, 나는 이 소식을 타천향의 소문주에게 전해야 한다.”
“전해서 뭐하려고.”
“……여기서 말할 수는 없어.”
비밀 투성이로군.
나는 연습용 철검을 진열대에 걸어놓았다.
“…….”
이런 타이밍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50층 공략을 끝내고 여유가 생긴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한창 바쁜 시기였다.
‘여기저기서 귀찮게 하네.’
“알았어. 가면 되잖냐.”
하루에서 이틀 정도는 시간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약간 밝아진 목소리로 유르넷은 통신을 끊었다.
나는 간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위령에게 말했다.
“니플헤임에 가고 싶댔지.”
“그렇다. 며칠이 걸려도 상관없어. 나는…….”
“오늘 바로 보내주마.”
위령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관계 좀 있다고 했잖아. 새벽에 데리러 갈 테니 준비하고 있어.”
“지, 진심인가!”
위령은 내게 득달같이 달려들더니 손을 꼭 쥐었다.
눈썹에는 물기마저 어려 있었다.
“정말 고맙구나!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으마. 반드시 각골난망하겠다!”
“알았으니 손 놓으시고. 방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라. 딴 데로 새지 말고.”
“알았다! 얌전히, 쥐 죽은 듯이, 시체처럼 누워 있겠다!”
“……그럴 필요는 없는데.”
위령은 내가 말하거나 말거나 훈련소 밖으로 황급히 뛰어갔다.
혼자 남게 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얌전히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엘시드의 영지인 황금향은 니플헤임도 총력전을 각오해야 할 만큼 강한 곳이었다.
정확한 전력은 알 수 없지만, 내가 알고 있는 놈의 능력이라면 그동안 무시무시하게 성장했을 것이다. 만약 둘 사이에 충돌이 벌어진다면 나는 더 이상 타오니어에 있을 수 없었다. 직접 지휘를 해야 할 테니.
나는 랭킹 1위의 플레이를 떠올렸다.
동영상도, 공략글도 없었으나 아주 우연한 계기로 그의 플레이를 보게 되었었다.
‘알고 있었군.’
영웅이 되어 이곳에 떨어진 지금, 그때는 몰랐던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놈은 픽 미 업의 영웅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진즉 알고 있었다.
‘엘시드가 잠적한 시기와 7성을 얻은 시기가 엇비슷하다.’
아마 놈이 사라진 것은 7성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보나 마나 역천의 서겠지.
‘그럼, 지금 그곳을 지배하는 건 마스터가 아니라 영웅인가?’
거기까진 모르겠다.
7성의 승급 조건은 영웅과 마스터의 융합이라 하지만, 100% 확실하진 않으니까.
무련이 어떻게 멸망했고, 엘시드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리고 위령이 우리에게 전할 말이 무엇인지는 니플헤임에 가봐야 알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이셀에게 로그 조작을 요청했다.
니플헤임의 비공정이 파견되었다는 로그를 지워주고, 만약 내일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나와 위령이 요일 던전에 나간 것처럼 보이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셀은 내 부탁을 흔쾌히 수락해주었고, 새벽이 되자 니플헤임의 소형 비공정이 타오니어에 몰래 기항했다.
“그대는 타천향에서의 지위가 무엇인가? 그대의 말 한마디에 비익선이 바로 오다니. 심상치 않구나.”
니플헤임으로 향하는 비공정 위에서, 위령이 말을 꺼냈다.
어느새 호칭도 바뀌어 있었다.
“…….”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알게 될 텐데, 굳이 여기서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유르넷이 보낸 비공정은 초고속 모델이었는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번개와 유황이 몰아치는 장소에 도착했다.
니플헤임이었다.
우우웅.
차원의 소용돌이가 비공정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빛이 걷혔을 때 나를 맞이한 것은, 격납고의 광경이 아닌, 각기 다른 5개의 영역이 펼쳐진 니플헤임 13층의 풍경이었다.
철커덕.
나와 위령을 내려보낸 비공정은 작은 기계음과 함께 아래층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늦은 새벽에 송구합니다. 기다리고 있었나이다.”
유르넷이 내게 깊게 허리를 숙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필요해서 부른 거니까.”
“어쨌든 자리를 마련해두었습니다. 따라오시지요.”
“……?”
위령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나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위령에게 말했다.
“따라와라.”
유르넷이 나를 안내한 곳은, 13층 가운데에 있는 칠흑의 성이었다.
언젠가 돌아올 나를 위해 준비했다는 장소. 그곳 1층의 홀에 커다란 회의용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었다.
“여기 앉으시면 됩니다.”
유르넷이 테이블 상석의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내게 앉으라는 듯이 쿠션을 팡팡 두드렸다.
“…….”
뭐, 한두 번도 아니지.
나는 한숨을 쉬고는 거기에 엉덩이를 붙였다.
“잠깐, 거기는 문주가 앉는 자리 아닌가? 어찌 그대가…….”
“말을 삼가시지요. 이분은 니플헤임의 주인이시자 문무백관의 통솔자이신 로키님이십니다.”
“뭐라?”
위령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당황에서 당혹으로. 당혹에서 경악으로.
“귀공은…… 나를 놀리는 것이오?”
“그럴 리가요. 이분이 당신이 찾고 있었던 타천향의 지배자십니다.”
유르넷이 빙긋 웃었다.
나는 혀를 찼다. 굳이 저렇게 놀려먹어야 되는지.
“허나, 저자는 타오니어란 곳의…….”
“거기에는 특별한 사정이 있다. 위 공.”
홀 왼쪽의 복도에서 차가운 인상의 청년이 나타났다.
서열 3위인 리디기온.
급하게 자리한 만큼, 1파티에서는 두 명밖에 부르지 못한 것 같다.
“그대는…… 리 공이 아닌가!”
“인사는 나중에. 마스터의 면전이다.”
리디기온이 나를 보더니 무릎을 꿇었다.
“마스터를 다시 뵙습니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마. 피부에 닭살 돋는다.”
내 말을 깨끗이 무시한 리디기온이 절도있게 일어섰다.
나와 리디기온을 번갈아 보던 위령은 낭패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찾던 자는 적령검을 쓰는…….”
“저분은 타천향의 종주이시다.”
위령의 입이 벌어졌다.
유르넷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마스터, 리디기온과 무련 사이엔 특별한 연이 있습니다.”
“말 안 해도 알아.”
나는 3개월가량, 리디기온을 무련으로 파견 보낸 적이 있었다.
목적은 물론 리디기온의 무기술을 한층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나를 아연하게 보던 위령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타천향의 종주께 나, 무련의 무인인 난위령이 청이 있어 왔소!”
위령이 내게 무릎을 꿇었다.
“평화 약정을 어기고 무련을 도살한, 무도하기 그지없는 그자를 토벌해주시오!”
위령은 이마를 땅바닥에 박았다.
어찌나 세게 박았는지 쿵, 소리가 홀 전체에 울렸다.
“…….”
예상은 하고 있었지.
“그자를 내버려 두면 타천향에, 아니, 이 삼천대천세계에도 크나큰 업화가 될 것이오. 청하건대, 종주께서 그자를 토벌하여 대천 전체에 뜻을 드높이시오!”
“토벌이라.”
유르넷이 중얼거렸다.
묘하게 감정 없는 목소리였다.
“현 랭킹 1위를 우리더러 지워달라는 뜻입니까.”
“그러하오. 그자는 아무 포고도 없이 우리 무련을 선제공격하고, 양민을 학살했소. 잔악하기 짝이 없는…….”
“재밌군요.”
유르넷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내가 말하지.”
리디기온이 유르넷을 가로막았다.
“고개를 들어다오, 위 공.”
위령이 머리를 들었다.
하얀 이마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사정을 말해보도록.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 알았소.”
위령은 말을 더듬으면서도 무련이 멸망할 때의 일을 설명했다.
부하들과 함께 대강당에서 무기술을 연마하고 있었는데, 다짜고짜 큰 소리가 나더니 수상한 옷을 입은 자들이 쳐들어왔다. 거기의 대장에게 련주인 단자흠이 죽고 수많은 무련인이 학살당했다.
“…….”
리디기온이 눈을 감았다.
“련주가 죽은 건 안타깝군. 훌륭한 사람이었건만.”
“그러하다. 놈들은……!”
“마스터.”
리디기온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무련을 도울 수 없다.”
“어, 어째서인가?”
“타천향과 무련이 연이 있던 것은 사실이다. 나도 거기서 많은 것을 배웠지. 하지만 앞뒤를 모르는 일에 끼어들 수는 없어. 그렇지 않은가, 위 공.”
“그자는……!”
“위 공이 본 건 수상한 자들이 쳐들어와서 련주를 죽이고, 무련인을 학살했다. 이뿐이잖나.”
리디기온이 말을 이었다.
“황금향이라면 우리도 쉽게 볼 수 없는 곳이다. 위 공은 자신의 분함을 풀기 위해, 우리더러 전부를 걸라는 것인가?”
“…….”
“일단 머리를 가라앉혀라.”
“리 공, 그대가 어찌 그런 말을! 련주님이 리 공을 얼마나……!”
“니슬레드.”
유르넷이 짧게 내뱉자, 천장에서 검은 신형이 떨어졌다.
“방으로 모시거라.”
“예.”
니슬레드가 주저앉아 있는 위령을 데려갔다.
홀이 조용해졌다.
“마스터.”
유르넷이 입을 열었다.
“……생각 중이야.”
리디기온의 말에 틀린 것은 없다.
위령의 증언에는 무련이 공격당한 이유가 나와 있지 않았다.
만약 거기에 니플헤임도 관계되어 있다면 손을 써야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상황을 알 수 없었다.
일단, 가장 큰 의문점이 있었다.
‘무련과 도라도는 서버가 다르잖아.’
각각 3서버와 4서버였다.
주기적으로 열리는 서버 초월 이벤트가 아니라면, 원칙적으로 다른 서버 유저와 교류할 수가 없었다.
‘뫼비우스도 아주 관리가 개판이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버그 없고 서버 좋기로 소문난 게임이었는데, 그 사이에 평가가 바뀌어버렸다.
각종 커뮤니티에서도 엉망이라며 난리가 났으니.
‘뭔 생각이지?’
엘시드는 PVP 유저가 아니다.
나와 비슷한, 아니, 오히려 나보다 훨씬 지독한 진성 공략파였다.
혹시 무련이 먼저 시비를 건 것은 아닐까?
그것도 이상하다. PVP를 지양하는 건 무련도 마찬가지였다.
‘하필 이 때에.’
웬만한 놈이라면 유르넷에게 맡기고 넘어가겠으나,이번은 그럴 수 없었다.
최소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아야 했다. 사정에 따라 엘시드가 니플헤임에 손을 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르넷.”
“예, 한번 조사해 보겠습니다.”
유르넷은 내게 고개를 숙이더니, 홀 뒤편으로 사라졌다.
홀에는 나와 리디기온만이 남았다.
“…….”
리디기온은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위령의 증언을 되짚어보고 있을 수도 있고, 사제의 연이 있다던 단자흠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파견 전후로 확 달라지기는 했지. 그 전에도 이미 충분히 강자였지만. 내가 리디기온이라는 영웅이 완성되었다고 느낀 시점은 그가 무련에서 돌아온 이후였다.
‘검마라는 칭호도 무련에서 얻었다고 했나.’
어쩌면, 니플헤임에서 머무는 기간이 하루 이틀 정도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나는 리디기온을 내버려 둔 채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니플헤임에 머물겠다고 했지만, 오래 지체할 수는 없었다.
지금도 타오니어에서는 파편의 알이 꿈틀거리고 있을 것이다. 니플헤임에서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길어봤자 사흘에서 나흘. 그 이후에는 바로 돌아가야 했다.
‘쌍으로 난리 났네.’
나는 한숨을 쉬고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계속 살펴봤다.
타오니어에서 가져온 전력 확장에 대한 문서들이었다.
복귀하면 바로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야 하므로, 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목표 병력은 400명, 비공정은 중소형급 5대. 영웅들의 레벨은 최소 40이 넘어야 하고, 리더급 영웅은 적절한 스킬과 각인을 들고 있어야 한다.’
니플헤임의 마스터였을 때는 적당한 녀석을 골라 업무를 위임하면 됐지만, 지금은 쉽지 않았다.
안 그래도 바쁜 네리사를 다른 쪽으로 뺄 수도 없었고. 기존 영웅들 중에서도 관리직으로 쓸만한 녀석이 없었다.
“드시지요.”
책상 위로 따끈한 김이 오르는 찻잔이 놓여졌다.
뒤를 돌아보자, 언제 왔는지 유르넷이 서 있었다.
“늦어도 오늘 저녁에는 1차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그렇게 서두르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이 타오니어의 중요한 시기라는 걸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뜨거운 홍차를 들이켠 뒤 말했다.
“예전처럼 박혀있으라고는 안 하네.”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습니다만…… 마스터가 그곳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버렸거든요.”
“애착?”
나는 혀를 찼다.
애착이라기보다는 오기에 가까웠다.
내가 죽나, 네가 죽나 식의.
“그것도 하나의 애착이 아닐까요.”
유르넷은 빙긋 웃었다.
“처음엔 마스터를 혼자 떠나보내는 게 불안했습니다만, 이젠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것 또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만약 마스터가 곧장 니플헤임으로 오셨다면 적응에 많은 시간이 걸리셨을 수도 있습니다.”
“의미라기엔 좀 그렇지 않냐? 너도 알겠지만, 거기는 별의별 놈들이 개판을 치는 곳이야.”
“니플헤임의 문은 언제든 열려 있습니다, 마스터. 원하신다면 부디.”
나는 입을 다물었다.
타오니어에 남는다고 한 건 나였으니.
“어떤 위기가 오든 극복하실 거라 믿고 있습니다. 저희는 멀리서 볼 뿐이지요.”
“그거참 고맙네.”
나는 홍차를 한꺼번에 들이켠 다음 서류를 마저 정리했다.
이것만 보면 밤새도록 했었던 확인 작업도 거의 끝이다.
“마스터, 위령이라는 자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타오니어로 데려가야지. 마스터가 뻔히 지켜보고 있는데.”
요일 던전이란 핑계로는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게다가 녀석을 활용할 방법을 찾았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현재 타오니어에서 꼭 필요한 역할이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 비공정을 준비하지요.”
“배웅이 빠른데.”
“배웅이 빠른 게 아닙니다, 마스터. 서둘러 마스터가 졸업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철컥.
책상에 검은 칼집이 올려졌다.
목재가 아닌, 특제 금속인 흑철로 만들어진 칼집이었다.
칼집 밖으로 기다란 검자루가 엿보였다.
“비프로스트의 수리가 끝났습니다. 마스터가 갖고 계신 각인에 알맞게 조정 작업을 거쳤으니, 이전보다 훨씬 다루기 수월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나는 비프로스트를 벨트에 걸쳤다.
이전보다 살짝 묵직해졌지만, 특유의 무게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잘 쓰마.”
“부디 그래 주시길.”
저 녀석의 성격에, 분명 비프로스트에 온갖 기능을 추가했을 것이다.
시범식은 타오니어로 돌아간 뒤, 실전에서 하기로 했다.
“추태를 보여 미안하오, 종주.”
그날 저녁, 위령이 내게 찾아와 사과했다.
“흥분에 휩싸여 보기 좋지 않은 꼴을 보였구려. 너그럽게 봐주시길 부탁드리겠소.”
“반말 찍찍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경어체냐. 하던 대로 해라.”
“하지만 공자는 타천향의 종주로서…….”
내가 노려보자, 위령이 주춤거렸다.
나는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도라도가 무련을 별 이유 없이 공격했다면, 우리도 가만히 있진 않을 거야.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르니까. 지금 한창 조사하고 있으니까, 괜히 복수라느니 대의라느니 호들갑 떨지 말고 조용히 있어.”
위령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이성을 되찾은 것 같다. 만약 아직까지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면, 타오니어로 돌아가자마자 바로 암케나에게 폐기 처분되었을 것이다. 겨우 합성은 면한 것 같다.
나는 위령에게 타오니어에서 맡을 역할을 알려 주었다.
그녀는 연자의 맹세 때문에 임무 필드에서는 제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하지만 리디기온의 말에 따르면 임무 밖에선 별다른 패널티를 받지 않는다고 하니, 맡을 역할은 하나밖에 없었다.
‘외정 담당.’
은별 길드의 고자질로 최근 암케나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때때로 잡놈들이 쳐들어오고는 했으니. 만약 50층 임무에 출전했을 때 그런 놈들이 공격해온다면, 타오니어는 소규모 인원만으로 궤멸적인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누군가는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지.’
원래 6성 만렙이었던 위령의 레벨만 적절히 올려준다면, 혼자서 수십 명의 영웅들은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역할을 위령에게 제안했다.
“……임시직인가.”
“가능하면 임무에 들어오는 게 좋지만, 지금은 그렇게 해라.”
“알았다.”
위령은 곧바로 대답했다.
외정에 5성 영웅을 쓰기에는 아까웠지만, 합성으로 버리는 것보다는 수십 배 나았다.
그날 새벽,
나는 13층의 별관에 홀로 서 있었다.
조사 보고를 받기 위해서는 특별한 절차가 필요하다며 유르넷이 나를 이곳으로 부른 것이었다.
“마스터,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별관 저편에서 유르넷이 나타났다.
처음 만났을 때 입었던 새하얀 로브 복장.
오른손에는 환영의 마도서인 나글파르가 펼쳐져 있었다.
“조사보단 재현이라는 말이 맞겠군요.”
“재현?”
스으으.
유르넷의 로브 자락에서 안개가 뿜어져 별관 곳곳을 감싸기 시작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장소 전체를 빈틈없이 꽉 채운 안개는 뒤이어 색다른 풍경으로 변해갔다.
뾰족하게 솟아 있는 수많은 누각과 건물들. 유선형의 지붕 위에는 기와가 올려져 있었고, 건물 밑에는 연꽃이 무수하게 피어난 연못이 자리 잡고 있었다.
‘…….’
하나하나 놀라지 않기로 했다.
이 정도 능력을 지닌 애들이니까.
“이번 영상은 위령에게서 추출한 기억과, 현장에 남아 있던 잔존 마력, 그리고 예전 서버 통합전 때 파견해두었던 정보원을 통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일치율은 대략 90%. 오류값은 5% 미만입니다.”
건물 곳곳에서 사람 형상의 안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안개는 도복을 입고 병장기를 찬 무련 소속 영웅들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치지지직.
공간 전체에 잡음이 일더니, 그들은 곧 바닥에 누워있는 시체가 되었다.
수십 명이 아니었다.
수백 명. 그들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건물 바닥에서 연못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폭포처럼.
그리고, 연못 가운데에 세워진 붉은빛의 누각.
두 명이 서 있었다.
한 명은 평범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품이 넓은 민무늬 도복을 입고 있었다. 발아래에는 부러진 칼이 떨어져 있었고, 오른쪽 아랫배 부근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또 다른 한 명은 잿빛 머리칼의 청년이었다.
늑대털 외투를 두른 청년은 반쯤 주저앉은 중년인을 내려보고 있었다.
“각각 무련과 도라도의 서브 마스터인 단자흠과 라스칸다입니다.”
“결판이 났네.”
“예. 마력 충돌의 여파로 전투 과정을 재현할 수는 없었습니다만, 일방적이었던 것 같군요.”
나는 곳곳에 널린 시체들을 살피며, 두 영웅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모두 6성 만렙들인가.’
이들은 무련의 내로라하는 정예들일 것이다.
픽 미 업 세계의 어느 곳에 가도 전혀 꿀리지 않는.
그들이 저 한 명에게 학살당했다.
‘총력전이 아니었군.’
대부대를 끌고 와서 기습한 게 아니었다.
침입자는 한 명. 무련은 단 한 명의 영웅에게 멸망 당한 것이었다.
유르넷이 눈을 가늘게 떴다.
“동행이 몇 명 더 있었습니다만, 실제 전투에 참여한 인원은 저자뿐입니다.”
“…….”
나는 청년을 자세히 살폈다.
라스칸다. 엘시드의 서브 마스터.
짙은 회색 머리칼을 휘날리는 저 남자는, 1년 전만 해도 강자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1년의 공백 뒤, 그 자리는 시리스가 차지하게 되었다.
‘7성이…… 되었다고 했지.’
내가 알고 있는 게 맞다면, 저 영웅은 도라도의 마스터를 흡수했다.
“려, 련주님…… 으윽!”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누각으로 향하는 길 위, 익숙한 여자가 쓰러져 있다.
위령이었다.
과연.
여기서 봤었던 건가.
치지직.
공간 전체에 잡음이 크게 일었다.
그리고 단자흠의 입이 열렸다.
“어째서인가.”
“…….”
라스칸다는 침묵하고 있었다.
내가 있는 곳에서는 놈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투명한 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여기까지가 재현 마법의 한계인 것 같았다.
“마스터, 재현 과정에서 하나 알아낸 게 있습니다.”
“뭐냐.”
“저 영웅은 다른 7성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제 조사에 의하면, 다른 7성들은 간섭력의 폭주를 억누르지 못해 어딘가 마력 패턴이 불안합니다만, 저자는 완벽하게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마치…… 지금의 마스터처럼 말이지요.”
또 꼬아서 말하긴.
나는 픽 웃었다.
유르넷의 말이 어떤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의 나처럼.’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7성 승급 조건은 영웅과 마스터가 융합하는 것. 다만 단결회 때의 일을 생각해보면 영웅이 마스터의 힘을 다루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저놈은 제대로 쓰고 있단 말이지.’
아직 확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떤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영웅이 마스터를 잡아먹은 게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지 않을까.
“우리 무련은 그대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소. 헌데 어찌 이런 무도한 짓을……!”
단자흠이 반쯤 무릎을 꿇었다.
이미 얼굴빛은 새파랗게 변했고, 입에서 죽은 피가 쏟아져나오고 있다.
“……즐거운.”
약간은 저음.
그러나 노래처럼 선명한 음색이었다.
“아주 즐거운 모험이었지.”
“무슨…… 말이오.”
“이곳에 온 뒤로 모든 것이 즐거웠어. 나는 보람찬 경험을 할 수 있었지. 아마 우주 제일의 행운아가 아니었을까.”
라스칸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것도 전부 끝났어.”
서걱.
누군가의 목이 잘리는 소리가 나더니, 안개가 공간 전체에 휘몰아쳤다.
“영상은 여기서 끝입니다.”
“수고했어.”
모험이라.
저놈도 어디 하나 나사가 빠진 거 같다.
“마스터, 다음이 마지막 보고입니다.”
“또 남아 있었냐?”
“예. 어떻게 보면, 이번 보고가 핵심이라고 볼 수 있지요.”
유르넷이 손을 내젓자 눈앞에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픽 미 업의 메인 메뉴였다. 유르넷은 내 앞에서 메뉴를 조작해서 도움말 탭에 들어갔다. 계정 정보를 확인하자 로키라는 계정명과 함께 고유번호, 게임 플레이 시간, 달성 업적 등이 주루룩 나열되었다.
“아까 라스칸다가 모험이라고 했었죠.”
“그랬지.”
유르넷은 계정칸 구석에 띄워져 있는 트로피 모양의 아이콘을 눌렀다.
업적을 확인할 수 있는 창이었다.
[Pick Me Up! – 명예의 전당] [마스터 중의 마스터, 최고 중의 최고만이 오를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 [명예의 전당에서는 역대 픽 미 업 클리어 유저의 목록과 순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명예의 전당.
클리어 유저가 나오지 않는 픽 미 업에서는 장식에 가까운, 유명무실한 기능이었다.
“그 영웅의 모험이 끝났다는 말은…….”
유르넷이 화면을 아래로 긁어 내렸다.
“맞는 거 같습니다.”
[ 1. 엘 시드(4서버)] [명예의 전당 제1위!] [모든 스테이지를 클리어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랭킹 1위, 엘 시드.
픽 미 업 최초의 마스터이자 첫 번째 랭커.
그리고 방금, 그는 처음으로 게임을 클리어한 유저가 되었다.
시기를 계산해보니, 엘 시드가 무련을 침공한 것은 게임을 클리어한 이후였다.
이 다음이 중요했다. 그가 무련을 공격한 원인을 알아야, 미리 방비를 할 수 있었다. 내가 마스터로서 완전하지 않고, 시리스가 빠져 있는 지금의 상태에서 그가 공격해온다면 니플헤임으로서는 상당한 출혈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패배할 수도 있었다.
‘왜?’
유르넷이 내게 보고한 내용은 무련이 괴멸당한 시점의 재현 영상과 랭킹 1위의 명예의 전당 입성, 두 가지뿐이었다. 그 밖의 정보들은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최선을 다해 조사 중이라고 했다.
게다가 유르넷은 이 이상 의미 있는 정보를 얻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애초에 서버 간의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기에, 영상 재현에 성공한 것만 해도 기적이라 불릴 만했다.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할까.
아니면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까.
생각할 여유는 많지 않았다.
나는 타오니어의 핵심 구간인 50층을 앞두고 있었으니까.
“고심이 많으시군요.”
니플헤임 13층의 성에 설치된 특실.
유르넷이 내게 차를 내밀었다. 순백의 자기로 만들어진 최고급 찻잔.
찻물을 넘기자 알싸한 향이 코끝으로 퍼졌다.
“너무 걱정하시는 마십시오.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계시지 않습니까. 니플헤임의 일 때문에 그곳의 임무가 방해받아서는 안 되지요.”
“가지 말라고 할 때는 언제고,”
“마스터가 바라신다면 저는 그 길을 닦아드릴 뿐입니다. 물론, 원하는 바가 없지는 않습니다만. 예를 들면…… 요즘 저와의 연락이 뜸하다거나. 이런 사소한 것들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마스터에게 마지막으로 사적인 연락이 온 게 언제였지요. 기억이 안 나는군요.”
유르넷은 빙긋 웃었다.
나는 말없이 찻물만 들이켰다.
“어쨌든, 우리가 그들과 부딪친다 해도 그리 빠른 시기는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답답하단 말이지.”
여러 가설을 세워봤지만, 하나도 들어맞지 않는다.
첫 번째 가설은 스테이지를 클리어한 엘 시드가 목표가 사라져 PVP 방향으로 플레이 스타일을 바꾸었다는 것. 하지만 이건 말이 안 된다.
나는 놈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초면도 아니었다.
몇 번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고, 한동안 게임에 대한 팁을 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왜 안 돌아갔지?’
만약 놈이 나처럼 영웅이 되어 뫼비우스에 떨어졌다면, 게임을 클리어한 시점부터 현실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 엉망진창인 세계를 떠날 수 있다는 것이다. 나 같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구로 향했을 것이다.
하지만 엘 시드는 떠나지 않았다.
“마스터.”
“……왜.”
“지금 랭킹 1위의 신상 정보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늦어도 마스터께서 50층을 클리어하실 때까지는 받아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 이유는 아직 알 수 없다는 건가.
‘영문을 모르겠군.’
나는 2성 승급식에서 텔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픽 미 업이 만들어진 목적.
‘멸망한 세계를 되돌리기 위해서.’
거기에 필요한 것이 상위 차원인 지구의 힘이었다.
따라서 이곳은 지구인의 참가를 유도하기 위해 모바일 게임처럼 만들어졌다.
‘엘 시드가 탑을 끝까지 올랐다면…….’
그곳의 세계인 도라도는 탑의 형식을 벗어나, 원래대로 돌아온 건가.
거긴 지금 어떻게 되어있는 거지.
그것 또한 알 수 없다.
“……짜증 나네.”
나는 머리를 긁었다.
답이 안 나오는 문제를 붙잡고 고민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중요하기 그지없는 문제였다.
계속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내가 보기엔, 놈은 자발적으로 지구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텔이 다시 한번 통수를 쳤을 수도 있지만…….
‘정말 모르겠네.’
나는 머리를 세게 긁었다.
“그러다 머리 빠집니다.”
“절대 안 빠지니까 신경 꺼라.”
나는 신경질적으로 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르넷의 말대로였다. 엘 시드와 싸운다고 해도 그 시기는 50층을 클리어한 뒤가 되겠지.
일에는 순서가 있다. 답이 없는 질문을 붙잡고 끙끙대봤자,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다.
‘위령한테나 가봐야겠네.’
위령은 우리가 임무에 나가 있는 동안 대기실을 지켜달라는 나의 제안을 수락했다.
임무에서 활약하는 것만큼 중요한 역할이었다. 복귀했을 때 대기실이 폐허가 되어있다면, 그 정도로 힘 빠지는 일이 없으니까.
제대로 싸울 수 있는지, 정신 상태는 괜찮은지.
그녀의 컨디션을 체크하고 재차 다짐을 받아둘 필요가 있었다.
“심려 마라. 할 수 있으니. 밥만 축내고 있을 순 없지 않느냐.”
위령은 내게 웃으며 답해주었다.
얼굴에 그늘은 가시지 않았으나, 처음 왔을 때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 같았다.
“다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다. 만약 그자와 싸우는 날이 온다면…….”
무언가 말하려던 위령이 눈을 내리깔았다.
“아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내가 공자에게 하기에는 창피한 부탁이야. 그 날이 오면 말하도록 하마.”
“그렇게 해.”
놈과 격전을 치르게 되는 때가 온다면, 그때 말을 들어줘도 괜찮겠지.
그전까지 이 녀석은 무련이 아닌 타오니어의 영웅으로 활동하게 될 것이다.
“연자의 맹세란 것도…… 임무에서 활용할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겠다.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닌 것 같구나.”
“그 생각은 마음에 드네. 하루빨리 그랬으면 좋겠군.”
“한데, 공자는 어찌하여 그런 고행을 하는 것인가. 대문파의 종주가 하찮은 변방에서 문지기 노릇을 한다니. 일종의 수련방법인가?”
“……그렇다고 볼 수 있지.”
하나하나 설명하긴 귀찮은 일이었다.
나는 대충 대답을 해주었다.
“공자, 하나 더 물어봐도 되겠나?”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혹시 1지대가 무얼 하는 곳인지 알고 있느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다.
느닷없이 1서버에 대해 묻다니.
“놈이 1지대에 관해 언급한 걸 들었다.”
“언급했었다고?”
나는 되물었다.
내 눈초리가 사나웠는지, 위령이 서둘러 답했다.
“아니, 아주 찰나였다. 잘못 들은 것일 수도 있어.”
“거긴 테스트 서버야.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1서버는 픽 미 업의 베타 테스트 때 사용된 장소이자, 게임의 모든 구역을 총괄하는 메인 시스템이 위치한 서버였다. 1서버는 게임이 정식으로 오픈하며 폐쇄되었다.
라스칸다가 1서버를 언급했다라.
무련이 재현되었을 때는 듣지 못한 정보였다.
순간적으로 어떤 예감이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
하지만, 나는 그 생각을 닫아두었다.
그 녀석에 대해서는 나중에 고민하기로 했다.
지금은 50층이 먼저였으니.
“쓸데없는 말을 해서 미안하구나. 착각이었던 거 같아.”
위령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뭐, 내 생각은 지금 얘기해주지 않아도 괜찮겠지.
다음으로 나는 위령에게 일정을 설명했다.
우리는 내일 새벽에 급행선을 타고 타오니어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타오니어로 복귀하게 되면, 50층 공략을 위한 최종 준비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자원 문제는 해결했다.’
병력과 비공정 모두 목표한 숫자를 채웠다.
그러나 다음 난관이 남아 있었다.
‘영웅의 수준 문제인가.’
타오니어의 메인 공략조는 일반적인 4성 영웅 수준을 한참 뛰어넘는다.
이 사실은 4성급 차원도시에서 대규모 이벤트를 독식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내 예상으로는 50층에서는 네임드급 몬스터들이 대거 출동할 것이다.
평범한 몬스터들보다 수십 배는 강한 놈들이. 그들과 제대로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우리도 전력을 한층 더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나까지는 안 돼도, 비슷한 놈 한 명은 있어야 해.’
맹세에 묶여 있는 위령을 임무에서 쓸 수 없으니, 기존에 있던 유망주 중 하나를 골라서 집중적으로 키워야 했다.
‘제나 또는 벨키스트, 둘 중 한 명.’
마침 구구콘에게 전력을 늘릴 생각이 있다고 했다.
돌아가면 바로 물어봐야겠다.
나는 위령과 헤어진 다음 타오니어로의 귀환을 준비했다.
뭐, 딱히 준비할 건 없다. 비프로스트의 칼집을 벨트에 단단히 묶고, 간밤에 작성한 계획서를 챙기는 정도.
돌아갈 때가 됐다.
우우웅.
니플헤임 13층에 설치된 간이 발착장.
소형의 고속 비공정이 이륙하고 있었다.
“청하건대, 승리하시길.”
리디기온이 내게 묵례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처럼 과묵한 인사였다.
“위 공, 련주의 원한은 나도 잊지 않는다.”
리디기온이 내 옆의 위령을 보면서 포권을 취했다.
“고맙소.”
위령도 마주 인사를 하더니, 한 발짝 앞서서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니플헤임의 정복을 곱게 차려입은 유르넷이 내게 다가왔다.
“마스터, 언제나처럼 이기실 거라 믿고 있습니다.”
“언제나라니.”
“마스터께선 백전불패 아니십니까. 그 누가 적이라도 말이지요. 저희를 지옥에서 구제해 주셨던 그때처럼, 이번에도 그들을 구해주소서. 그리고…… 무사히 돌아와 주시면 됩니다.”
유르넷이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잊지 마십시오. 힘드시면, 언제든 돌아오셔도 됩니다. 니플헤임의 권좌를 비워 놓겠나이다.”
“그럴 일은 없…….”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번처럼 잠깐 들리기는 하겠지만, 만약 완전히 돌아오는 날이 있다면 100층 깬 다음이겠지.
하지만 여기서 그 말을 하는 건 맛이 없다. 나는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때는 잘 부탁하지.”
“저야말로.”
유르넷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너무 구박하진 마라. 종종 연락할게.”
“그래 주신다면 바라는 게 없습니다.”
유르넷은 장난스런 미소를 지은 뒤 천천히 물러났다.
나는 두 명에게 눈인사를 했다. 그리고 비공정에 탑승했다.
조종자의 안내와 함께, 공중에 떠오른 비공정이 차원의 소용돌이를 향해 나아갔다.
* * *
[Congratulation!] [마스터, 픽 미 업의 모든 스테이지를 클리어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남자는 보고 있었다.
“…….”
홀로그램 화면이 떠 있다.
화면에서는 어색하게 만들어진 종이 인형들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마스터의 위업은 길이길이 칭송될 것입니다.] [Mobius INC] [DIRECTER – ALPHA0]조금은 유치한, 8비트의 배경음악이 흘러나왔다.
화면이 검게 바뀌더니, 흰색 글자의 스탭롤이 천천히 화면 위로 떨어져 내렸다.
[GAME DESIGN] [Senior Game Designer – ALPHA1] [Lead Game Designer – ALPHA2] [Game Designer – ALPHA3] [Game Designer – ALPHA4] [Game Designer…….]남자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CHARACTER MODELING] [Lead Game Designer – DELTA1] [Game Designer – DELTA2] [Game Designer……]영상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1분에서 5분까지. 5분에서 10분으로.
[SPECIAL THANKS] [RAUD…….]마침내 20분가량 이어진 길고 긴 영상이 끝나고, 스탭 롤이 닫혔다.
효과음과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치지직.
회색 노이즈가 화면 전체에서 번쩍이더니, 홀로그램 창이 깨끗이 사라졌다.
남자는 드넓은 광장에 홀로 서 있었다.
곧이어 사방이 어두워졌다.
“……이 세계는.”
남자가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