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ame's Top Troll RAW novel - Chapter 109
109화 깨어나는 세계수 (2)
[죄송하지만,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에메랄드 빛깔의 눈동자를 빛내며 은근히 기대하는 듯한 표정으로 물어 오는 세계수. 그녀의 물음에 재영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뭘 부탁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마 제가 들어주기에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세계수.
원래는 신화 속에나 존재하는 초월적인 존재. 정확히 어떤 능력이나 힘을 가졌는지 밝혀진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신에 버금가는 힘과 권능을 가진 그녀가 하는 부탁이라면 아마 답도 없는 수준의 난이도를 가진 퀘스트일 것이 분명했다.
‘이미 개연성도 바닥이 난 상황인데, 이 이상 일 크게 만들면 곤란하지…….’
-개연성: 115,468.
분명 엘프와 드워프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수준으로 끝내려고 했던 재영. 그런데 어쩌다 보니 탄이 애지중지하는 마계의 신검을 산산조각 내 버렸고, 얼마나 오래전부터 묵혀 온 것인지 모를 엘의 복수까지 대신해 주었다.
그 결과, 빡이 쳐도 단단히 빡이 쳐 버린 대마왕과 깨어나 버린 세계수.
이미 이 정도만 해도 그 여파가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기에, 재영은 딱 봐도 메인 시나리오급 이상일 것으로 보이는 그녀의 퀘스트를 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난색을 보이며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거절의 의사를 밝힌 재영. 그런 그의 말에 세계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완전히 모든 것을 통찰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의 단편적인 정보들을 읽어 낼 수 있었던 세계수. 그녀의 눈에 비치고 있는 재영은 그 어느 인간보다도 많은 것을 해내고 이루어 낸 존재였다.
[제 눈에는 확연히 보이는걸요. 초보자 살인마, 유물 파괴범, 귀족 살해자, 악랄한 네크로맨서, 마왕도 뜯어 먹는 협잡꾼, 슬라임의 성자……? 이건 특이하네요.]“그, 그걸 어떻게……?”
재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그가 가진 칭호들을 하나하나 나열하기 시작한 세계수.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에 재영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세계수는 재영을 보며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비록 이상한 것도 많긴 하지만…… 당신이라면 충분히 제 부탁을 들어줄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아니, 당신이 하지 못한다면 아마 그 어떤 인간도 하지 못하겠죠. 그건 확실해요.]재영이 가지고 있는 칭호를 읽어 낸 세계수. 비록 이상한 칭호들로 가득해 보였지만, 동시에 다른 인간들은 평생에 하나 이룩하기 힘든 위업들도 무수히 많았다.
숭고한 심판자.
중립의 구도자.
평등의 혁명가.
드워프들의 친우. 그리고 엘프들의 영웅.
그 누구도 쉽게 쌓을 수 없는 업(業)으로 가득 차 있는 재영. 그렇기에 세계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단 들어 보지 않으시겠어요? 제가 부탁하는 게 무엇인지 말이죠.]* * *
태초의 아르카디아.
이 세상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아르카디아는 하나의 거대한 대륙이었다.
판게아(Pangaea).
[북쪽 세상은 말이야. 언제나 혹한과 추위가 가득한 폭풍이 휘몰아치며 온통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다고 해. 그리고 거기에는 하얀 용이 사는데, 깊은 잠을 자고 있어서…….] [세상의 중심에는 아주 커다란 나무가 있대.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끝도 없이 펼쳐진 숲이 있는데, 그곳에 사는 요정들과 나무들은 세상의 중심에 뿌리를 내린 그 거대한 나무를 지키고 있대.] [그 세상의 지하 깊은 곳에는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사는 난쟁이들이 있는데, 엄청난 손재주를 가지고 있어서 다양한 물건과 보물들을 만들며 지내. 술을 좋아해서 자꾸 땅 위 사람들과 거래를 하려고 하는데, 그때마다 다툼이 생겨서 서로 사이가 안 좋아…….]순수한 아이의 동심 속에서 창조된 하나의 세계(世界).
규모를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히도 거대한 하나의 대륙. 그리고 그 거대한 대륙을 단단하게 지탱하고 있는 것은 바로 대륙의 중심에 존재하고 있던 세계수였다.
[과거에 아르카디아는 거대한 하나의 대륙으로 이루어져 있었죠. 하지만 제가 끝을 알 수 없는 잠에 빠져들게 되면서 많은 것이 변화하게 되었죠.]성마대전.
아르카디아 대륙 전체가 절멸의 위기에 빠졌던 그 재앙의 순간. 사력을 다해 아르카디아의 생명체들을 보호했지만, 결국 영원한 잠에 빠지며 대륙 전체를 뿌리로 굳건하게 지탱하던 그녀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성마대전이 끝나고 난 후, 아르카디아 대륙은 더 이상 본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죠. 오랜 세월 동안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하고 멀어진 결과, 현재는 수많은 대륙으로 찢어져 나눠지게 되어 버렸죠…….]창세기와도 같은 신화 속의 이야기.
재영은 세계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감탄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설정들을 짠 거야……?’
아르카디아 역사에도 적혀져 있지 않은, 숨겨진 신화 속 이야기와 설정들. 아르카디아를 플레이 하면서 매번 놀라는 일이지만 너무나도 많은 것이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세상이 생각보다도 더욱 거대하고 그리고 이 게임에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콘텐츠가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했다.
“그래서…… 저에게 원하는 게 뭐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아직 말해 주지 않은 세계수. 그녀는 재영의 물음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저는 흩어져 있는 대륙들이 다시 하나로 합쳐지길 원해요.]“……네?”
재영은 세계수의 말을 듣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르카디아에 흩어져 있는 대륙들. 정확히 몇 개나 되는지 공식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었지만, 그 대륙들에 뭐가 있는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아르카디아의 제2대륙에서 벌어진 초보자 마을의 파괴는…….] [아르카디아 제2대륙에서 벌어진 슬라임 사태는…….] [아르카디아 제2대륙에서…….](주)아르카디아 한국 지부가 무언가 공식적인 성명을 낼 때마다 매번 붙이는 수식어.
제2대륙.
그 말은 아르카디아 내에 제1, 제2, 제3의 대륙이 존재하고 있고, 각 대륙마다 다른 국적의 유저들이 아르카디아를 하고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세계수가 꿈꾸고 있는 목표는 다름 아닌…….
“서버 통합인가……?”
[네? 무슨 통합이요……?]재영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세계수.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재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그걸 어떻게 할 수 있는데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파악조차 되지 않는 아르카디아의 대륙들. 그것들을 하나로 합친다는 말도 안 되는 스케일의 일을 재영이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무슨 드래곤X 모으는 것도 아니고, 그 거대한 대륙들을 인간의 힘으로 옮길 수 있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재영의 물음에 세계수는 싱긋 웃으며 간단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다만 제가 그런 힘을 발휘할 정도로 회복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인 거죠.]“그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요?”
그녀의 말에 재영은 황당한 눈초리로 세계수를 쳐다보았다. 초록색 머릿결의 작은 소녀의 모습을 한 그녀. 하지만 실상은 아르카디아 대륙…… 아니, 이 가상의 세상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나무라는 것을 재영은 다시금 깨달으며 물었다.
“알겠어요. 그래서 제가 뭘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는데요?”
[음…… 당장 급하게 해 달라는 건 아니에요. 그저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때, 그럴 만한 힘이 된다고 느끼실 때 제가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주시면 돼요.]“필요한 물건이요? 그게 뭔데요.”
필요한 물건이 뭐냐는 재영의 물음. 그의 물음에 세계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드래곤 하트요.]“…….”
그 말에 황당한 표정으로 세계수를 바라보는 재영. 그녀는 재영의 그런 표정을 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아, 이왕이면 고룡급 이상으로 가져다주세요. 그 정도는 돼야 효과를 볼 것 같거든요.]“……씨발.”
하여간 이 게임은 X같은 게임이다.
* * *
잠에서 깨어난 재영. 그가 깨어나자마자 본 것은 바로 동그란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어린 엘프의 얼굴이었다.
“어! 멜리사 니임! 여기 인간님 일어났어요오!”
분명 풀숲 어딘가에서 잠이 들었던 재영. 하지만 그새 쓰러져 있는 그의 모습을 엘프들이 발견하고 옮겨 놨는지, 재영이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멜리사의 처소였다.
[퀘스트, ‘흩어진 대륙’이 생성되었습니다.]퀘스트가 생성되었다는 알림음. 재영은 복잡한 표정으로 퀘스트 창을 열어 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퀘스트, 흩어진 대륙]과거 하나의 대륙이었던 아르카디아는 지금 여러 개의 대륙으로 갈라져 버렸다. 깨어난 세계수를 회복시켜 다시 흩어져 있던 대륙을 하나로 합쳐라.
-드래곤 하트 (0/1)
드래곤.
자그마치 드래곤을 잡아서 그 심장을 가져다 바치라는 소름 끼치는 요구 조건을 내세운 세계수. 도대체 만물의 어머니인지 뭔지 하는 칭호는 어디에 갖다 버린 것인지, 아르카디아 세계관의 최강자인 용종의 심장을 가지고 오라는 그녀의 부탁에 재영은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하아……. 도대체 이 게임의 고위급 존재라는 것들은 왜 제정신인 것들이 없는 거지…….”
악마보다 가끔은 더 악랄해 보이는 천사.
필기까지 하며 진정한 악행이 뭔지 배워 간다며 엄지를 치켜들며 좋아하는 악마.
인성이 터져 버리다 못해 증발해 버린 싹퉁바가지의 이종족들.
거기에 유일신 사상에 미쳐 대량 학살과 문화 말살을 서슴지 않는 신성 교단까지.
도무지 하나하나 되짚어 봐도 정상인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게임 속 세계관과 설정들. 이 게임은 강해지는 대신 정신 줄을 놓아야 하는 법칙이라도 있는 것인지 진심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재영이었다.
“깨어났군요!”
재영이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채 앉아 있는 동안 칸나의 외침을 듣고 어딘가에서 황급하게 달려온 멜리사. 그녀는 딱 보기에도 다급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은 멜리사. 그런 그녀를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재영이 묻자 그녀는 환희에 찬 얼굴로 소리쳤다.
“세계수가……! 세계수가 깨어났어요!”
호들갑을 떨며 자신을 부르는 엘프들의 외침에 이끌려 간 멜리사. 그녀가 엘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에서 본 것은 기적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이, 이건……?”
분명 이전까지만 해도 검게 물들었던 세계수의 나무 기둥. 마치 역병에 걸린 것처럼 이곳저곳에 검은 반점이 돋아 있던 부분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갈색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르게 강렬하게 풍기는 자연의 향기. 숲 전체가 맥동하는 것 같은 거대한 생명력의 움직임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럴 수가…….”
세계수.
만물의 어머니이자 자연 그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 지금까지 희미하게 느껴지던 그녀의 존재감이 그 어느 때보다도 뚜렷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에 멜리사는 밀려오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세계수의 주변을 이리저리 호기심 어린 얼굴로 날아다니기 시작한 존재들. 그것들을 마주한 엘프들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어렸다.
“저, 저것 봐! 정령들이야!”
“이럴 수가…… 소환하지도 않았는데 자연 그대로의 정령들이 나타난다니…… 이건 설마…….”
자연 그 자체였던 세계수가 잠든 이후, 아르카디아 대륙과 정령계와의 연결이 거의 폐쇄되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엘프들만이 가지고 있는 정령력을 이용해 간신히 정령들의 힘을 빌려 오던 수준. 자연 속에서 정령들이 그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저, 정령계와의 채널링이 복구됐어!”
“이, 이럴 수가! 이건 기적이야!”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에 빠진 엘프들. 하지만 재영은 그런 그들을 보며 전혀 기뻐할 수 없었다.
“저기요, 멜리사.”
“예. 왜 그러세요?”
너무나도 어두운 표정의 재영. 그런 그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며 대답하는 멜리사에게 재영은 진심을 가득 담아 물었다.
“혹시 드래곤 하트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