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117
117화. 영갑, 아니무스
“아, 아니 아무리 정령술사래도 그렇지. 초월무구인데도 마나나 마법 관련 능력치가 없는 물건을 고른다고? 반쪽짜리지 않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빙염의 마도사, 티네스가 자기 일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몇 번이고 바람의 지배자를 가져가길 권했지만.
“아뇨, 이 아니무스야말로 저에게 딱 맞는 무구입니다.”
타이니는 흔들리지 않았다.
다른 능력을 다 떠나서, 영혼의 힘의 영구적 상승이라니.
오러유저를 넘어 오러마스터 이상의 경지로 가는 길이 영혼의 힘에 달려 있다고 짐작하는 그로서는 그 능력치 하나만으로도 아니무스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그 눈빛에서 확실한 각오를 읽은 티네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내가 말렸다는 것은 기억하게.”
“물론입니다.”
타이니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어 보였지만, 티네스는 여전히 망설이는 얼굴로 위임받은 황제의 인장을 천천히 꺼내 들었다.
탁.
우우우우웅.
투명한 상자가 벗겨지자마자 마나를 뿜어내며 더욱 강렬한 존재감을 뿌리는 아니무스.
“호오, 역시 그래도 초월무구라는 건가?”
그 순간에는 티네스 역시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그리고 타이니는, 아니무스가 존재감을 드러내는 순간 그것을 어찌 사용해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팡.
가볍게 힘을 주자 입고 있던 예복의 상의가 그대로 터져 나갔다.
그리고 이내.
우웅.
의지에 따라 영혼의 힘이 움직이고, 아니무스가 가볍게 날아 그의 어깨 위로 안착하는 순간.
우웅.
‘반갑다.’
잃었던 짝을 되찾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에 절로 흡족한 미소가 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찌이이이이잉.
“흡!?”
신비한 감각이 머릿속을 짜르르 울리며 한없이 고양되는 느낌이 온몸에 번지고, 순간적으로 주변이 온통 새하얗게 변하더니 자신의 영혼이 급격하게 팽창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짧은 듯하면서도 긴 시간, 그 안에서 지극한 자유와 평온이 느껴지던 그때.
– 아우우우우우우우!!!
월랑이 기분 좋은 하울링과 함께 새하얀 공간에 나타났다.
지금 녀석을 실체화한 것보다 훨씬 큰, 생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서로를 보며 영혼의 자유를 만끽한 두 영혼이 미소를 지으며 겹쳐지는 순간.
번쩍.
다시 눈앞이 하얗게 꺼지더니, 새하얀 공간에 있던 그는 현실로 돌아왔다.
– 컹! 컹!
영혼의 저편에서 월랑이 아쉬움을 표현할 때.
타이니는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갑옷을 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우우웅.
주먹을 꽉 쥐는 순간 대기가 떨리는 느낌이 들고, 허공에 주먹질을 하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가볍게 터져 나갔다.
파앙.
‘대략 두 배 이상 강해진 건가. 이거 말도 안 되는군.’
힘만 강해진 게 아니다. 그만큼 더 몸이 단단해지고 감각 역시 예민해지는 느낌.
심지어 영혼의 힘마저 대폭 상승한 것이 체감될 정도였다.
게다가 이게 전부도 아니었다.
아니무스의 또 다른 가치는, 바로 정령술사로서 성장함에 따라 그 능력치도 상승한다는 데에 있었다.
고작 3단계의 정령술 경지로도 이미 육체적 능력이 2배 이상으로 상승한 상태.
‘정령술 1단계가 착용 조건이라 하면, 단계당 거의 50%씩 상승한 거라 볼 수 있겠어. 역시 초월무구!’
50% 상승한 능력치에 또 50% 정도 상승해야 지금 이 정도 증폭력이 나올 테니까 말이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초월무구의 이름값을 넘치도록 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이미 비상식적으로 월등한 신체 능력을 가진 자신이다. 거기에 아니무스의 힘이 더해진다면.
‘오러의 파괴 권능만 무마할 수 있다면, 특별한 아티팩트가 없는 오러유저 정도는 정면에서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몰라.’
거기에 더해.
우웅.
평상시에도 맥동하는 마나바디, 염체가 마나 회복력이 급속도로 상승했음을 알리며 환희에 떨었다.
이미 카룬의 사태나 황궁 전투에서의 경험으로 자신이 영혼의 힘 덕에 마나 탈진 상태를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음을 확인했지만.
‘이 정도라면…….’
지금의 경지에서는 몇 번이고 전력을 쏟아 내도 오버리바운드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거, 잘만 활용하면 오러에도 저항할 수 있을지도…….’
숨길 수 없는 기쁨에 자연스레 입가가 움찔거리더니, 끝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하하! 좋아!! 너무 좋아!!”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티네스는 연신 안타까운 듯 다른 초월무구들을 돌아봤지만, 타이니는 그 선택이 정말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 * *
“갑옷이라…… 잘 어울리는군. 초월무구가 그대의 체형에 딱 맞춰지던가?”
“예, 폐하.”
“호오, 신기하군. 그 듬직한 모습을 보니 선물한 보람이 느껴져. 잘 어울린다. 아주…… 야성적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군.”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폐하.”
그 말대로 정말 진심이 묻어나는 타이니의 표정에 황태자의 입술도 자연스레 호선을 그렸다.
그의 말은 그저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아직 기사치고는 작은 키, 거기다 예복이 찢겨 훤히 드러난 상체에 견갑과 짧은 망토만을 걸친 모습.
이상하다면 무척이나 이상한 꼴인데, 그게 또 묘하게 강인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어느새 타이니의 마나에 동화된 듯 노을빛 마나를 슬그머니 피워 올리고 있는 아니무스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내심 기대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오러유저나 마도사도 아닌 사람이 초월무구를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되다니. 정말이지 여러모로 놀랍군. 앞으로는 또 어떻게 나를 놀라게 할지 기대될 정도야.”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폐하.”
“그래, 그래야지. 자네가 어딜 가든 제국 출신임은 잊지 말게.”
“물론입니다, 폐하.”
많은 말이 생략된 대화였지만, 둘은 서로 만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둘이 독대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타이니가 성물 아모르를 되돌려 놓기 위해 황궁을 찾았던 날, 공을 세운 보상으로 작위와 영지를 하사하겠다고 제안하는 황태자에게 그는 자신의 계획 일부를 들려주었다.
– 저는 악마추종자들을 쫓아 그들의 음모를 저지하고 박살 내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반쯤은 왜곡된 목표였지만, 황태자는 그것으로 충분히 납득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한 피해가 상상을 초월하는 탓에 이미 악마추종자들에 대한 경각심이 극도로 솟구친 상태였으니까.
“자네가 그 빌어먹을 쓰레기들을 대륙에서 깨끗이 청소하는 날을 기대하지. 그 초월무구가 그 길에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네.”
황태자의 덕담에 타이니 역시 완연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넘치도록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물론 그때도 초월무구 같은 거창한 보상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처음 제안받은 것보다 더 큰 상을 받은 셈이 되었다.
초월무구라면 어설픈 영지나 작위 몇 개와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니까.
‘검제에게도 따로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지.’
타이니의 마음은 지금 그야말로 꽃밭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황태자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래, 그리고 무형의 보상 또한 준비했으니 조금 더 기대해 봐도 좋을 것이네.”
……무형의 보상?
황태자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보상이라 하니 받아 둬서 나쁠 것은 없을 터.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타이니는 다시 한번 진심을 담아 예를 표했다.
* * *
– 카룬에서 자유 기사의 작위를 받은 광휘의 기사 타이니를 제국 황실의 이름으로 다시금 기사로 봉하고 초월무구 아니무스를 하사하니, 제국과 카룬 양국에서 그의 발길을 막는 자는 없어야 할 것이다.
황태자의 공식 발표는 아세리안을 중심으로 세상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타이니에게 작위나 영지를 하사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그를 고위 귀족과 다름없이 대하라고 공표한 것이다.
초월무구의 가치를 아는 자들은 아니무스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초월무구보다는 광휘의 기사라는 사람이 무슨 공을 세웠는지에 대해 주목했다.
악마추종자들이 일으킨 아세리안의 재앙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이 광휘의 기사다.
카룬에 이어 아스란까지, 그는 두 나라를 파멸적 재앙에서 구해 냈다.
대륙 7대 신성(新星)은 이제 8대 신성이라 불려야 한다.
아니다. 그를 신성들과 같은 반열에 놓으면 안 된다. 그는 이미 기대주가 아닌 최고의 영웅이다.
그 무성한 소문들은 결국 타이니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하나였다.
– 대체 그 대단한 사람이 어느 가문 출신이야?
이미 세간에는 천민 출신이라는 말부터 발렌티아 기사 출신이라는 말까지, 갖가지 소문이 떠돌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거기에 ‘검은 머리, 검은 눈’이라는 뚜렷하고 특이한 특징이 한발 늦게 알려지고, 대전에서 있었던 일까지 와전되어 퍼지면서 공교로운 소문 하나가 퍼져 나갔다.
“차기 황제 폐하 앞에서 모르스라는 가문을 언급했다던데?”
“그 모르스 가문 사람들이 검은 머리 검은 눈이었다더라.”
“그럼 혹시……?”
“맞네, 딱이잖아!”
“그럼 본명은 타이니 폰 모르스, 방계라면 그냥 타이니 모르스인가?”
타이니가 몰락 귀족 모르스 가문의 후예라고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수도 발렌티아의 저택에서 엘븐하임으로 향할 준비를 서두르던 타이니로선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미치겠네.”
타이니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는데, 그 옆에 서 있던 가렌 클레멘이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하하, 뭐 어떤가? 어차피 기사는 준귀족이니, 이제 사라진 가문의 후예를 자처한다 한들 문제가 되지는 않을 텐데?”
“문제가 됩니다.”
“왜?”
‘언젠가 진실이 밝혀지면 제 목에 칼을 박으려 할지도 모를 암살자가 있거든요.’
그것도 세계 최고의 암살자가 말이지.
타이니는 그 속내를 토해 내는 대신 그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에 가렌이 이번에는 조금 진지한 얼굴로 되물었다.
“내게 말하기는 곤란한 일인가?”
“……개인적인 일일 뿐입니다.”
“흠…… 뭐, 고민하고 부딪치고 또 성장해 나가는 게 젊은이의 덕목이지. 말하기 싫다면 그래도 좋네. 하지만 말하고 싶어지면 언제든지 털어놓게. 고민은 나눌수록 덜어지는 것이니.”
“감사합니다, 가렌 경.”
“뭘, 친구끼리 당연한 것을.”
등을 툭 치며 돌아서는 가렌을, 타이니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았다.
블루윙의 부단장씩이나 되는 사람이라기엔 너무 소탈하다 못해 일견 가벼워 보이기까지 하는 그 언행 속에 진중함이 배어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낀 것이다.
‘드렉슬러 경도 그렇고, 확실히 검제가 사람 보는 눈은 있는 것 같아.’
두말할 필요도 없는 압도적인 재능의 보유자, 대륙 7대 신성 중 한 명인 북풍의 기사 제나스부터 두 부단장까지. 실력의 고하를 떠나 그들의 인품만으로도 함께하는 사람으로선 무척이나 든든할 따름이었다.
‘이런 사람이니 엘프하고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거겠지.’
가벼운 한숨으로 스트레스를 털어 버린 타이니는 바로 그에게 따라붙어 말을 걸었다.
“그런데 가렌 경, 대체 엘프 수행자하고는 어떻게 친구가 된 겁니까?”
엘븐하임으로 향하는 길의 파트너이자 열쇠. 그 사연을 잘 알아 둘 필요가 있었기에 던진 말인데.
“음? 원래 사나이끼리는 가슴으로 통하는 법이 아닌가. 우리는 첫눈에 친구가 될 것이라고 알아봤지.”
그야말로 턱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예?”
“그게 전부인데?”
“에이, 설마. 그냥 보자마자 친구 하자, 그러진 않으셨을 거 아닙니까.”
“그랬는데?”
“예?!”
“뭐 대화의 과정이 조금 더 복잡하긴 했지만, 큰 맥락에서는 틀리지 않네.”
“…….”
“허, 자네라면 이해할 줄 알았는데? 우리도 그렇게 친구가 되지 않았던가.”
……내가? 언제?
이 사람, 설마 모든 상황을 자기 좋을 대로만 기억하는 거 아닐까?
잠시 불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검제가 그렇게 허투루 일을 맡길 사람은 아니었다.
‘역시 좀 이상한 사람이긴 해.’
걱정은 됐지만, 그의 도움이 있어야 엘븐하임에서 벌어질 이번 재앙을 막을 확률이 높아진다.
타이니는 더 이상 질문을 포기하고 얌전히 그 뒤를 따르기로 했다.
가렌과 약간 거리를 둔 채로.
그리고 그즈음.
어딘가의 암실에서는 검제와 타이니의 계획이 근본부터 엎어질 만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엘븐하임의 일은 취소, 아니 무기한 연기한다. 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