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90
12화
“뭐? 얼마나?”
“하루. 자고 갈 거야.”
“갑자기 왜?”
의아하게 묻자 리즈벨이 금세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오래 있겠다니까 싫어? 반응이 왜 그래?”
“아니, 그게 아니라.”
로제스는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석고상같이 무표정하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쳤다. 그는 다소 쩔쩔매며 누이를 달랬다.
“늘 반나절도 채우지 않고 돌아갔으니 그렇지. 그 이상 머무는 건 안 된다면서.”
“이번에는 돼. 아무리 생각해도 반년에 서너 시간은 좀 짧은 것 같단 말이야.”
리즈벨은 이유 없이 투정을 부리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녀가 이 세상에 속일 수 없는 이가 단 한 명 있다면 바로 로제스였다.
리즈벨이 로제스에게 속을 숨길 수 있었던 건 어린 시절 미친년 행세를 할 때가 유일했다. 그마저도 중간에 들켰지만.
이번에도 로제스는 리즈벨의 말투에서 풍기는 묘한 위화감을 단번에 잡아냈다. 누이에게서 이만치 풍부한 감정을 끌어내는 사람은 로제스가 아는 한 그 자신을 제외하고 딱 한 명이었다.
“싸웠니?”
“…….”
주어 없는 물음이었지만 리즈벨은 곧바로 알아듣고 입을 다물었다. 다물린 붉은 입술에서 고집스러움이 느껴졌다. 로제스는 확신하고 재차 물었다.
“왜 싸웠어?”
“…….”
“그가 너를 속상하게 했니, 리즈벨?”
물으면서도 로제스는 이번에 아그네스의 손에 들려 마탑주에게 보낸 편지에 욕을 한마디 덧붙이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아냐, 그런 거.”
리즈벨은 로제스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진 것을 눈치채고 고개를 흔들었다.
“안 싸웠어. 그냥 내가 서운한 일이 있어서 그래.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뭘 서운하게 했는데?”
로제스는 누이를 소파에 앉혀 놓고는 진지하고 집요하게 물었다.
“너 오늘 안 들어오는 걸 알면 아시어스가 걱정을 많이 할 텐데?”
마탑주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순화된 표현이었다.
“그렇기야 하겠지. 하지만 아시어스는 나한테 이걸로 뭐라 할 자격 없어.”
“뭐 때문에 그러는데?”
“……요즘 아시어스가 좀, 이상해.”
리즈벨은 결국 한숨과 함께 말했다.
“툭하면 말도 없이 외출하고. 약속도 안 지키고. 가끔 새벽까지 안 들어올 때도 있어. 나는 아시어스가 혼자 있을까 봐 일찍 일찍 들어가는데.”
망설인 게 무색하게도, 로제스 앞에 있으니 아이 같은 불평이 와르르 쏟아졌다.
“약속한 시간에 내 눈앞에 없으면 불안해. 아시어스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내가 모르고 있는 게 싫어. 나한테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건 더, 더 싫어.”
“이유를 물어봤는데 말을 안 해?”
“안 해. 평소에는 조금만 찔러 주면 전부 실토하는데, 요즘 들어서 내 눈도 피하고, 거짓말만 하고…….”
“……그랬구나.”
“어제는, 심지어 가출까지 하고.”
“가출?”
“어제 안 들어왔어. 지금까지 무단 외박은 한 번도 한 적 없었는데.”
아시어스는 어젯밤에 리즈벨이 무슨 심정이었는지 꿈에도 모를 것이다. 그가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버거운 공포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자동으로 재생되는 것은 아시어스가 멋대로 죽어 버렸을 때의 기억이었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를 거야.”
그 고백은 리즈벨이 가장 싫어하는 말로 뼈에 새겨졌다. 그런 일이 다시 오지 않으리란 걸 머리로는 너무나 잘 알았다.
그러나 이성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럴 때는 되살아나는 끔찍한 공허함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산 채로 온몸의 피가 전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 그도 모르지 않을 텐데. 그러니 더더욱 이렇게 저를 방치해 두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리즈벨은 험악하게 일갈했다.
“오늘 안 돌아갈 거야. 아시어스는 내가 무슨 기분인지 직접, 제대로 느껴 봐야 해.”
“아, 그럼.”
로제스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맞가출이군.
* * *
1년에 두 번, 아그네스는 그녀가 태어난 시간 선을 방문했다. 이 시대에 아그네스의 자리는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세상은 그녀의 이름도, 생김새도, 갖고 있던 직위마저도 잊었다.
다만, 그녀가 유년 시절을 보낸 라타에 남부의 시골 마을은 꼭 아그네스의 기억 속의 모습처럼 완벽히 복구되었다.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는 다시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작은 학교가 세워졌으며, 심지어는 아그네스가 살던 고아원까지도 새로이 지어졌다.
리즈벨의 배려였다. 그녀는 아그네스조차 잊고 사는 사소한 부분들까지도 꼼꼼히 챙기곤 했다.
가령, 자신이 자리를 비울 때 연인에게 아그네스를 직접 부탁한다든지.
아그네스는 시골 마을의 길거리를 걷다, 어색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직접 따라와 주지 않으셔도 괜찮은데.”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뒤를 따라 걷던 남자가 딱딱하게 대답했다.
“나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아, 네에…….”
아시어스 뤼켄. 마탑의 주인은 오늘도 찬바람 쌩쌩 불도록 냉랭했다.
리즈벨의 정말 몇 안 되는 단점 중 하나는, 세간이 아시어스 뤼켄의 성격을 평하는 말들을 체감하지 못한다는 거였다.
‘잘생긴 만큼 성격이 나쁘다’는 말은 곧 성격이 더럽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리즈벨도 그 말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겠지만, 그녀는 실제로 아시어스가 타인에게 얼마나 싸늘한지 잘은 몰랐다.
첫 만남부터 아시어스가 유례없이 그녀에게 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에게 아그네스가 코웰을 돌아볼 수 있도록 챙기라는 말을 남기고 간 것이다.
‘나름의 콩깍지인가…….’
하지만 어딘지 석연치 않은 부분은 있었다. 아그네스는 조금 의아한 기분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리즈벨과 자리를 바꾸며 하얀 시간의 세계에서 잠시 만났을 때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이번에는 좀 늦을 거야. 하루 뒤에 올게.”
“하루 꼬박이요?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기류가 심상찮다 싶으면 바로 신호를 보낼 테니 걱정 마.”
“아니, 그게 아니라…….”
리즈벨은 1년에 두 번 아그네스와 자리를 바꾸어 본래 그녀의 시간 선으로 돌아갔다. 머무는 시간은 반나절 정도였다. 그 이상 머무르면 시간 선이 흔들릴 위험이 있으므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 둘이 합의를 본 것이 1년에 두 번, 반나절이라고 했다. 한 번은 로제스의 생일로, 그리고 한 번은 그들의 어머니 라일라의 기일로 정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웬일인지, 리즈벨이 하루를 꼬박 채워 머무르고 싶다고 말했다.
“마탑주도 아시는 일인가요? 그걸 허락하셨어요?”
“아니, 몰라.”
“네에?!”
“내가 오라버니 보러 간다는데, 굳이 아시어스 허락을 받을 이유 없잖아. 내 마음이지.”
그렇게 말하는 리즈벨의 표정은 전에 없이 굳어 있었다. 어딘지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갑자기 왜…… 혹시 싸웠어요?”
“응.”
“네에에?! 아니, 저기. 리즈벨!”
이렇게 나를 두고 가면 어떡해! 불똥은 누가 감당하고!
아그네스는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리즈벨은 이미 시간의 타래를 잡고 떠나 버린 뒤였다.
마탑주는 아그네스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10년 전 리즈벨이 아그네스를 구하기 위해 제 곁을 떠났던 것을 아직까지 탐탁지 않아 하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리즈벨은 자리를 비울 때마다 늘 그에게 아그네스를 잘 부탁한다는 언질을 주고 갔으므로, 그는 대놓고 아그네스가 싫다는 기색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차라리 대놓고 짜증을 내는 게 더 나을 지경이었다.
저 남자의 잿빛 시선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면 아주 날카로운 바늘이지 않을까. 그런 시선을 계속 등으로 받고 있으니 고슴도치가 된 기분이었다.
아그네스는 코웰 시내를 보는 둥 마는 둥 하고서는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마탑주를 불러 세웠다.
“저, 이제 돌아가도 될 것 같아요.”
“다 봤습니까?”
“네에……. 리즈벨에게 고맙다고 꼭 전해 주세요.”
“예.”
아시어스가 고개만 건성으로 까딱함과 동시에 그들의 발밑에 푸른 이동진이 펼쳐졌다.
아그네스의 눈앞이 푸르게 물들었다. 어렸을 적 온 마음으로 그리워했던 고향이 멀어지는데도 아그네스의 머릿속은 대체 이 사태를 마탑주에게 어찌 고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아그네스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이, 그녀는 다시 마탑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시어스는 편히 쉬라는 말만 툭 던지고는 다시 마탑의 최상층 침실에 틀어박혔다.
리즈벨이 그를 떠나 로제스의 품으로 돌아가 있는 날이면 늘 그랬듯이.
그리고 리즈벨은 그녀의 말대로 반나절이 지나고도 돌아오지 않았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