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890
약먹는 천재마법사 890화
운명을 보는 눈(26)
“탑을 벗어날 수단이 있었다면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사용하지도 않았겠지.”
층계 위쪽 복도에서 울려 퍼지는 차가운 목소리.
“아직 탑에 있어. 등대지기와 직접 대화를 나눠본 관계자만 불러서 시작하자.”
“…….”
49구역 견뢰의 마탑. 지상 8번 층계에 위치한 아이템 사업부.
라피스는 아이템을 쌓아둔 카트 아래 숨어 제니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정전시킨 마탑 내부시설을 복구시키고, 3분 만에 인원을 편성해 수색에 나서기까지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라피스가 며칠을 고민하며 겨우 만들어낸 빈틈을, 잠깐의 소란으로 넘겨버릴 만큼 빠르고 기민한 대처.
하지만 이렇게 될 것을 알면서도 라피스는 제니의 앞에서 탈출을 시작해야만 했다.
탑의 시설을 정전시켜 찾아오는 잠깐의 빈틈.
고작 그 한순간으로 라피스가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언제나 감시가 붙어 있는 라피스의 처지로는 포위망을 떨쳐낼 방법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렇기에 라피스는 반대로 감시자를 직접 선택해 기회를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탑의 관리를 맡고 있는 제니시아는 그 능력과는 별개로, 마력적성과 소질이 그리 높지는 않은 사람.
만약 제니와 독대한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다면, 일시적으로 탑의 감시 아래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움직이면 안 돼. 움직이면…….’
초견의 공능을 지닌 라피스는 타인의 시선이나 감각에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한다.
추적자들의 시선이 닿는 순간을 인지하고, 기척을 집중적으로 은폐해 아직 들키지 않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덜컹!!
누군가 라피스가 숨어 있던 카트를 끌고, 대뜸 지점 안쪽으로 옮기기 시작한 것.
지점으로 들어가면 추적자들의 시선을 피하는건 쉬워져도, 복도 밖으로 나가는 일은 요원해진다.
하지만 라피스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카트 안쪽에 웅크리고 있었다.
저벅, 저벅.
카트를 지점 안으로 옮기고 문을 닫은 누군가 다시 이쪽으로 걸어온다.
필요한 물건을 찾기라도 하듯 손을 카트 안으로 뻗어 뒤지기 시작하는 모습.
“…….”
두 눈을 감고, 숨조차 쉬지 않은 채 기회를 기다린다.
아직 들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닿기 전에 공능을 사용해 제압하면-
툭.
머리를 가리던 가림막이 치워지고, 라피스가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리려던 순간.
“라피스?”
이국적인 인상의 여성이 놀란 듯이 라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보는 얼굴. 하지만 즉시 그 목소리를 알아들은 라피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벨린……?”
“왜 그렇게 놀라? 아, 이것때문인가?”
찌익!!
아무렇지도 않게 얼굴을 매만져, 면구를 벗은 이벨린이 멋쩍게 웃었다.
“그 녀석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도 나름 변장술에는 조예가 있거든. 꽤 자연스럽지?”
“놀랐잖아요……!”
라피스가 가슴을 쓸어내리자, 이벨린이 기가 찬 기색으로 허리에 손을 얹었다.
“말도 없이 먼저 시작한 건 라피스 너였잖아. 타이밍을 맞춘다고 얼마나 급하게 왔는 줄 알아?”
“……제니시아와 어느 시점에 독대할 수 있을지,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카트 안쪽에서 일어선 라피스가 대답했다.
“도와주실 수 없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음…… 솔직히 난 아직도 제니 앞에서 계획을 시작하는게 맞는 선택이었는지 모르겠어.”
이벨린이 떨떠름한 기색으로 말했다.
“굉장히 예민하고 감이 좋은 사람이야. 최악의 경우 발칸을 탈출한 뒤에도 발목을 잡힐 수도 있어.”
“알아요.”
라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벨린이 알려준 마탑 시설 전력공급회로. 멈춰 버린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복구해 버렸거든요.”
“탑 내부 시설 관리요령에 대해서는 탑주보다 더 잘 알고 있을걸? 일머리에 관해선 정평이 나 있거든.”
이벨린이 그렇게 말하며 곧바로 길쭉한 상자를 하나 꺼내 들었다.
“자, 그럼 포장해야 하니까 안으로 들어가.”
“……저는 오히려 이 방법이 맞는지 모르겠는걸요.”
라피스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천천히 상자 안에 주저앉으며 이벨린을 올려다보았다.
“화물로 위장해서 탑 밖까지 운반할 생각이라니…… 이거 정말 확실한 계획 맞는거죠?”
“마탑 밖으로 나간다는 점에서는 무조건.”
지직!!
이벨린이 박스테이프를 상자 위에 붙이기 시작하며 말했다.
“탑의 출입구를 모두 폐쇄한 시점에서, 저쪽은 네가 문이나 통로로 탈출하려는 걸 가장 경계하고 있겠지.”
“그건…….”
“그러니 우린 발상의 허점을 노려서, 마탑의 외벽을 부수고 탈출할 거야.”
“…….”
“노려야 할 곳은 상대적으로 결계의 강도가 취약한 13층 연구동. 술식연구를 위해 일부러 결계를 약하게 풀어둔 지역이지.”
사업체 지점 벽면에 붙어 있는 마탑 층계 안내문을 가리킨 이벨린이 말했다.
“다만 그러려면 탑의 권역을 일시적으로 중화시켜야 하는데, 이게 정말 어려운 일이라…… 네 협조가 있어도 많이 힘들 거야.”
“이벨린에게도 그 마법사의 권역과 충돌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거군요.”
놀란듯한 라피스의 질문에 이벨린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나게.”
“…….”
이벨린 마르시아는 위계를 초월해 8레벨에 다다른 궁사.
그럼에도 대마법사 본인도 아닌, 그 권역을 중화시키는 일이 그렇게까지 버거운 일이란 말인가.
“원래 나 혼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야. 이게 가능한 건 굉장히 여러가지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지.”
이벨린의 얼굴은 스스로 그렇게 말하면서도 굉장히 묘해보였다.
지직!!
“말한 대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탑 밖으로 내보내 주는 것뿐이야. 성채까지 가는 건 순전히 네 의지에 달렸어.”
박스 테이프를 단단히 박스 위에 둘러매어 고정시킨 이벨린이 물었다.
“이해했다면 바로 시작할게. 준비됐어?”
“이벨린.”
라피스가 조용히 대답했다.
“제게는 이제 시간이 많지 않아요.”
“…….”
“상황과 조건을 고려했을 때, 의식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뿐…… 에반 님도 아마 알고 계시겠죠.”
세계의 경계선에 존재하는 천견의 의식체가, 과연 언제까지 라피스를 기다리고 있을까.
애초에, 천견의 잔류사념은 경계선 너머에서 영원히 등대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걸까?
그랬다면 천견은 굳이 승천에 도전할 필요도 없이 영원히 외해를 관측하는 역할을 자처하면 될 일이었을 터.
라피스가 세계의 경계선에서 천견의 사념을 발견한 것도.
천견이 경계선 너머에서 라피스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모두 찰나에 가까운 우연한 기적이었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레녹도, 라피스도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이리 급하게 발칸에 찾아온 것이 아니었나.
“이제는 서로가 시간에 맞출 거라 상정하고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전…….”
라피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에반 님이 포기하지 않으셨다면, 분명 닿을 거라고 믿어요.”
“그래, 이해했어.”
박스 위까지 테이프로 동여맨 이벨린이, 다시 변장을 위한 면구를 뒤집어쓰고 방을 나섰다.
“가자.”
찰칵!!
이벨린은 라피스를 포장한 박스가 담긴 카트를 끌고 걷기 시작했다.
인파 사이에 자연스레 섞이면서도 너무 빠르지도, 또 느리지도 않은 속도.
주변의 시선을 감지하고 있던 라피스조차 무심코 감탄할 만큼 완벽한 동화.
“잠깐, 어딜 가는 거죠? 안에 뭐가 있는지 확인해 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벨린을 눈여겨보고 말을 걸어오는 용병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벨린은 당황하지 않고 들고 있던 회람표를 상대에게 넘겨주었다.
“자재부 전달사항입니다. 보안지정을 받은 문서들을 13층 연구실로 하달할 예정인데, 확인이 필요하다면 책임자 서명 부탁드려요.”
“서명? 무슨 문서길래 확인한 사람에게 서명을 요구하는 겁니까?”
용병들 중 누군가 회람표 안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고 표정을 구겼다.
“야, 이건…….”
“무슨 물건인데?”
사무소 소속이면서도 레녹과는 안면이 깊지 않은 용병들이 회람표를 보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바일런 교수가 탑주에게 직접 보낸 서신이라는데.”
“이거 여기서 열어봐도 되는 거 맞아?”
그 순간, 군청색 머리칼을 묶어올린 여성이 나타났다.
껌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복도를 순회하던 밀라가 이쪽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그렉, 무슨 일이야?”
“밀라, 이거 내용물을 확인하려면 서명이 필요하다고 해서…….”
“가져와.”
밀라가 표정을 확 찌푸린 채, 회람표를 뺏어 자기 이름을 적어넣었다.
회람표를 이벨린의 품에 휙 던져넣은 밀라가 밀봉된 박스를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됐지? 열어봐.”
“……반한테 보내는 서신일 텐데, 우리가 열어봐도 괜찮겠어?”
“그 파란머리 꼬맹이를 다시 잡아오는게 먼저야.”
밀라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무슨 내용인지 안 보면 되잖아.”
“…….”
“오히려 안일하게 넘겼다가 놓치는 걸 가장 싫어할걸. 나중에 화내면 머리 박고 밀지 뭐. 열어.”
이벨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테이프를 뜯어내자, 밀라가 박스를 휙 열어젖혔다.
수북이 쌓여 있는 종이들의 모습에, 밀라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삐질 흘러내렸다.
“X됐다. 진짜였네?”
“씨발, 빨리 닫아!!”
“아니, 안쪽도 확인은 해봐야지!”
밀라가 박스 안을 뒤지다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없네……?”
“…….”
말없이 이벨린의 눈치를 보던 밀라가 헛기침을 하며 슬쩍 뒤로 물러섰다.
“그, 미안합니다. 하던 일 계속하세요.”
“그러지요.”
“혹시 이번 일은 반에게 비밀로 해줄 수 있는지…….”
“실례하겠습니다.”
조용히 회유를 시도하는 밀라를 무시한 이벨린이 카트를 밀고 층계를 돌기 시작했다.
원형의 복도로 이루어진 층계를 한바퀴 돌며, 처음 빠져나온 지점의 방 앞을 지나친 그 순간.
이벨린이 자연스럽게 문 뒤에 높여 있던 두 번째 박스로 바꿔 쳐서 카트에 옮겨 담았다.
파앗!!
처음부터 지점 문 뒤의 박스에 숨어 있던 라피스가 감탄한 전성을 보냈다.
[전문가는 발상부터 다르네요. 급할수록 돌아가라?]“전문가 아니거든? 난 반대로 이런 수작을 부리는 녀석들을 잡는 입장이었다고.”
이벨린이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하도 상대하다 보니까 노하우를 알게 된 것뿐이야.”
[그런 것 치고는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는데…….]“몇 번 더 해야 하니까 준비해. 횟수가 정해진 게 아니라, 주변의 눈치를 봐가면서 조절해야 하거든.”
이벨린은 라피스의 말을 무시하고, 비슷한 수법을 사용해 빠르게 층계를 오르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검사가 몇번 더 이어졌지만, 이벨린은 놀라울 정도로 눈치빠르게 라피스를 숨겨냈다.
타고난 궁사인 만큼, 위기를 감지하는 능력 하나만큼은 다른 어떤 계통의 초인보다도 뛰어나기 때문일 터.
“후우…… 실수하면 안 되니까 나도 살짝 긴장이 되는데.”
한 번이라도 바꿔치기에 실패한다면, 숨어 있는 라피스를 고스란히 용병들 앞에 보여주게 되겠지.
‘이쪽으로.’
덜컹!!
그렇게 도착한 마탑 13층. 연구실이 배치된 복도와, 복도 문 앞에 산처럼 쌓여 있는 박스 상자들.
폐쇄된 탑의 13층계 출입구를 앞에 두고, 이벨린이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
“자, 그럼…….”
“어, 맞아. 저 사람 잠깐 멈춰봐.”
그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이벨린의 표정이 살짝 굳어버렸다.
휴대폰을 귓가에 댄 채로 통화를 하며 정확하게 이벨린을 가리키는 제니의 모습.
제니의 손짓에 옆에 서 있던 맨슨과 벨버가 곧바로 이벨린의 양옆에 섰다.
“그래, 세바스찬이 경고했던 47구역 쪽 사업부 보험처리는 그쪽에게 부탁할게.”
딸깍.
“당신, 우리쪽 사람이 아니지?”
순식간에 통화를 마친 제니가 이벨린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검문을 통과한 사람들만 골라서 후보군을 추렸는데, 그쪽이 가장 매뉴얼을 완벽하게 지키고 있더라.”
“…….”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난 처음부터 아예 실수하지 않는 사람들을 골라 주시하고 있었거든.”
대답하지 않은 이벨린을 보며 제니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등대지기가 내 앞에서 탈출을 시도했다면, 분명 굉장히 솜씨 좋은 협력자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으니까.”
그 순간, 라피스는 어째서 이벨린이 제니를 감이 좋고 예민한 사람이라 판단했는지 이해했다.
이성적인 추측과는 거리가 있지만, 자신의 감과 판단을 맹신하지 않고서는 내릴 수 없는 결론.
하지만 제니는 보란듯이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무려 이벨린 마르시아의 앞에서 증명해냈다.
“굉장히 뛰어난 도둑이나 암살자겠지? 기척이나 걸음에 아무런 특징도 없더군.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무서울 정도야.”
“…….”
“혼자였다면 실수조차 적당히 꾸며내 내 눈을 피할 실력이겠지. 그러지 못했던 건 라피스 팔시어를 무사히 탈출시켜야 하기 때문이겠지?”
이벨린과 천천히 거리를 벌리며 제니가 말했다.
만에 하나 있을 변수조차 완전히 차단하는 철저한 반응.
“의심을 피하기 위해 실수를 가장했다, 덜미가 잡히면 거기서 끝일테니까.”
“……후후.”
그 순간, 이벨린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천천히 다가오는 맨슨과 벨버를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기분이었나.”
“……뭐?”
쩌적!!
그 순간, 이벨린의 등 뒤에 쌓여 있던 수백 개의 박스 더미가 부풀어 올랐다.
전조조차 없이 시작된 기압의 변화.
그것이 기압을 의념으로 찍어눌러 인위적으로 만든 팽창임을 깨달은 이는 없었지만, 모두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깨달았다.
“맨슨, 잡아!!”
제니가 빠르게 소리치며 품 안에서 호신용 아티팩트를 꺼내 들었다.
“시선을 가리려는 거야. 뭔가 하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맨슨과 웨이안을 필두로, 다른 용병들이 박스 더미를 향해 달려든 순간.
뻐어어어엉!!!
“……!!”
박스가 폭발하며 내용물이 사방팔방으로 튀어오르고, 13층 복도 인근의 시야를 모조리 가려 버렸다.
“라피스.”
화악!!
라피스의 눈으로 보고도 그 속도를 정확하게 인지하기 어려울 만큼 기민한 은밀기동.
순식간에 라피스의 허리를 끌어안고 복도 가장자리 외벽 앞에 선 이벨린이 속삭였다.
“뛰어.”
콰아아아아앙!!!
마탑 외벽이 산산이 부서지며, 라피스의 신형이 수십 미터 상공에 그대로 내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