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espised Granddaughter of the Powerful Martial Arts Family RAW novel - Chapter (116)
116화
* * *
“후우.”
화려한 객방을 채우는 깊은 한숨소리.
백리패혁은 두 눈을 감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머리가 무겁게 짓눌리는 느낌.
육체적인 피로가 아니었다. 정신적인 피로였다.
작달막한 아이의 잔뜩 찡그렸던 얼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낯을 하고도 끝까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런 점은 전혀 안 닮았군.”
눈을 감은지 얼마나 되었을까?
백리패혁이 눈을 뜨는 것과 함께 객방 문이 벌컥 열렸다. 거대한 체격의 노인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낯으로 험상궂게 웃었다.
백리패혁이 슬쩍 미간을 찡그렸다.
“자네 아직 안 잤나?”
“내려 주세효오!”
백검 단주가 목소리를 가늘게 뽑아내고 킬킬 웃었다.
“자려고 누웠지요. 누웠는데······ 객잔 4층 백검단원은 모두 듣고도 남았을 겁니다. 기막을 펼칠 거면 처음부터 끝까지 펼칠 것이지 그게 뭡니까?”
“방금 그 꼴, 내 손녀딸을 흉내 낸건가? 명령되이.”
“친조부이자 가주만 아니었다면 뒤에 욕설이 붙어 있을 만큼의 패기던데요.”
“허튼소리.”
백검단주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백리패혁을 보다 방을 둘러보았다.
“이거 참······ 기막을 펼친 것이 가주님이 아니군요?”
거짓을 말한다고 백검단주의 기감에 숨길 수 없었다. 백리패혁은 침묵했고, 백검단주는 눈을 빛냈다.
자신이 나간 사이 들어왔다 나온 사람은 한 사람이었다.
백리연.
“흐흐흐, 갑자기 야밤에 왜 저리 난린가 했더니만······ 쓰읍.”
술병을 흔들며 다가온 백검단주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아니, 그럼 지금 좋아서 입이 찢어지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왜 그새 죽상이 됐습니까?”
쪼르륵.
백검단주가 들고 온 술을 백리패혁 앞의 잔에 따랐다.
“자자, 여기 축하주입니다.”
자신은 술병에 입을 대고 그대로 꿀꺽꿀꺽 마셨다.
‘아, 그러고보니. 아이쿠, 벌써 망가졌네요. 멀쩡하게 돌려주기로 했는데.”
백검단주가 술병을 쥐지 않은 손을 펼쳤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노란색의 작은 들꽃이었다.
이파리 부분이 구겨져 있었다.
백리패혁은 보자마자 누가 준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연이가 들어오면서 우철에게 줬다더군요. 귀엽지 않습니까?”
우철은 지금 문 앞에 호위를 선 백검단원이었다.
“흥, 고작 그게 뭐라고.”
“아, 예예. 가주님은 토끼 손수건이 있다고요. 제가 말한 건 귀엽지 않느냐는 소립니다. 마음씨가요.”
“······ .”
“누구와는 다르죠.”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자네마저 그러지 말게.”
“가주님, 백검단은 내가 키운 자식같은 아이들입니다.”
“재철.”
백리패혁이 경고하듯 뇌까렸다.
백검단주는 무시한 채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아이들의 마음이 가는 곳에 제 마음도 간다는 말이지요.”
“내 굳이 역정을 내야그만두겠는가?”
“내시든지요. 제가 이제 가주님 역정에 가슴 벌벌 떨 나이는 지나지 않았습니까? 슬슬 백검단주 자리도 넘겨줄 생각을 하던 참에 잘됐지요.”
“······ .”
“강호의 절대 고수로 천하에 비교할 자 몇 없을 지라도, 못난 자식 앞에 그저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아비일 뿐이라니. 자식 농사만큼은 천하 십일강이 무어랍니까?”
백검단주가 즐겁다는 듯 웃었다.
백리패혁이 굳은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다 입을 열었다.
“의묵과 명이, 장자와 장손으로 후계자리에서 쫒겨날 정도의 큰 잘못을 저지른 적 없네.”
그 말에 백검단주의 눈이 살짝 커졌다. 백리패혁이 이런 말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가 직접 백기의묵과 백리면, 둘의 자격을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늘 일언지하에 따지지도 못하게 막아왔다.
“헛된 바람을 입 밖에 내지 말게. 자네 말의 무게를 셈하게.”
잠시 침묵하던 백리패혁이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리고 의강은 지금 이를 신경쓸 때가 아닐세.”
제 아비의 얘기를 듣고 뛰쳐나가던 손녀의 모습이 선명했다.
벌써 의강에게 뭐라고 말을 전해야 할지 골치가 아팠다. 여기고 저기고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근래 내가 부덕했다는 생각이 든다네.”
“오, 가주님이 그런 말을 하시다니. 변하셨군요.”
백검단주가 정말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백리패혁이 실소했다.
“자네에게 묻지. 의강이 바라던가?”
“······ 솔직히 4공자님이 가주 자리에 관심이 없는 것만큼은 진심이지요.”
“그래. 바라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지.”
백검단주는 대답이 없이 그저 또 술을 한 번 들이켰다.
긴 침묵 후에 백검단주가 말했다.
“뭐, 가주님의 바람대로 명이 도련님이 인품이든 실력이든 둘 중 하나라도 있다면 다행인 것이지요.”
* * *
어둠 속에 모든 달빛을 끌어모은 것 같은 모습. 그러나 금안으로 보는 모습은 정반대였다.
희미한, 시들어 가는 빛이었다.
“······제갈 세가주.”
그늘진 눈매가 호선을 그리며 짐짓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무라고 부르라니까.”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나는 한숨을 속으로 욱여넣었다.
‘왜 하필 지금······.’
마치 지켜보다 딱 맞춰 나타난 듯한 타이밍이었다.
표정 관리하기도 힘겨운데 제갈 세가주까지 상대해야 한다니.
심지어 제갈 세가주는 이미 뭔가를 눈치챈 듯, 흥미롭게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관심이었다. 제갈 세가주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울어?”
“아니.”
눈 한 번 깜빡하는 새 기파가 훅 다가왔다. 눈가에 차가운 살결이 닿았다가 멀어졌다.
제갈 세가주가 자신의 마른 손끝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러네. 우는 줄 알았어.”
나는 순식간에 닿았다 떨어진 제갈 세가주의 손가락을 노려보았다.
제갈 세가주는 뭔가 미묘한 표정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살짝 아쉬운 것 같은 느낌?
‘아니, 뭐야?’
내가 울길 바라기라도 한 건가?
그때 제갈 세가주가 내 옆에 같이 주저앉았다. 나는 그 모습에 벌떡 일어닜다. 그러자 제갈 세가주가 내 팔을 붙잡았다.
“어? 왜, 가지 마.”
“왜겠어?”
간단히 답하고 뿌리치려는데 제갈 세가주가 너무하다는 듯 말했다.
“오는 내내 누가 떨거지 하나를 붙여 놔서 귀찮아 죽는 줄 알았는데. 누구는 아버지랑 할아버지 옆에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고 하하 호호 하고 말이야 응?”
“······ 나중에. 지금은 생각할 게 조금 있어.”
“무슨 생각?”
내 팔을 꽉 붙잡은 제갈 세가주의 손을 보았다. 마른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 품 안의 고양이를 보며 말했다.
“얘 이름이 뭐야?”
노골적인 말 돌리기였다.
제갈 세가주는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으나, 따지지 않고 방긋 웃으며 말했다.
“없어.”
“없다고?”
“응.”
제갈 세가주는 별거 아닌 듯이 덧붙였다.
“어차피 내가 먼저 떠날 텐데, 이름을 붙여서 뭐 해?”
“뭐라고?”
“내가 죽으면 불러 줄 사람도 없을 거 아냐?”
“······ .”
제갈 세가주에게서 이런 말들이 불쑥 튀어나올 때마다 무슨 말을 해야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괜찮아질 거다, 힘내라는 상투적인 말을 하기에는 제갈 세가주도 나도 그가 오래는 버티지 못할 걸 알았다.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는데, 제갈 세가주까지 심란하게 만들었다.
제갈 세가주가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거 알아? 내 위에 누나가 있었어.”
처음 듣는 소리였다.
“열두 살에 죽었어. 그게 벌써 2년 전이네.”
순간 의문이 들었다.
제갈 세가주가 몇 살에 죽었더라?
기억나지 않았다.
남궁류청이 강호를 독보했던 나이를 역으로 셈하면······ .
‘짧으면 3년에서 길면 5년 정도려나?’
그리고 그가 날 때부터 앓아 온 것과 같은 지병을 앓았을 누나가 죽은 나이까지 고작 1년.
나는 제갈 세가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선을 틀었다. 마침 시선을 튼 자리의 고양이가 눈길을 끌었다.
“·····그럼 지금까진 뭐라고 불렀는데?”
“딱히 부를 필요가 없어서.”
“한 번도 안 불러 본 거야?”
“응.”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내 의문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제갈 세가주가 설명했다.
“부르지 않아도 내 뜻을 이해하거든. 그러니까 뭐라고해야 할까······ .”
잠시 말을 끌던 제갈 세가주가 부연했다.
“얘가 나고 내가 얘랄까? 그래. 혼백을 나눈 사이라고 하면 되겠네.”
이 무슨 사이비 교주같은 소리야? 뭘 나눴다고? 혼백?
나는 제갈 세가주를 미심쩍게 바라보다 살며시 고양이를 내려 놓았다.
고양이가 억울하다는 듯 울며 내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사이비 교주 같아도 제갈 세가주가 하는 말이라 허튼소리로 여길 수 없었다.
나는 조심스게 물었다.
“그때······ 그······ 네가 말했었던 술법이란 거랑 관련된 거야?”
“맞아. 얘가 보고 겪는 건 다 내가 알 수 있어. 얘가 나니까.”
제갈 세가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우는 줄 알고 왔더니만······ 아니네.”
이 자식 아까부터 내가울었으면 하는 것 같은데.
일단 그건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니니 넘어가기로 하고, 나는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귀여워했었는데······ !’
그럼 난 지금까지 제갈 세가주를 쓰다듬은 건가?